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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구분은 어떻게? [고대/중세/근세/근대사회]

2007. 3. 12. 11:37

고대 사회

고조선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고 철기문화에 이르러 촌락공동체가 발달하기 시작하여 그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형태를 갖춘 것이 고조선이고 고조선은 한국 최초의 국가다.
고조선은 청동기시대 말엽인 기원전 5·4세기경에 초기국가로 발전하였으며, 그 영역은 요하유역에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고조선은 철기문물을 수용하면서 더욱 강성해졌으나 중국 한무제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기원전 108) 이 조선은 후에 이씨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부르게 되었다. 

삼국시대 

고조선이 붕괴된 이후 여러 지역에서 초기형태의 국가가 생겨났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만이 발전을 거듭하여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추는 데 성공하였다. 고대국가는 초기국가의 발전된 형태로서 국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적 정치체제가 마련되었으며 권력을 지녔던 군장들의 세력이 중앙으로 편제되었다. 

이러한 강력한 왕권과 집권적인 정치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사업을 전개하여 더욱 넓은 영토를 확보해 나갔다. 삼국시대는 이러한 성장을 기반으로 때로는 서로 충돌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경쟁적으로 발전하며 한반도를 3분한 시기를 말한다. 처음 삼국시대의 주도권은 고구려가 장악하였으나 후기에는 신라의 세력이 강력해져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신라통일의 배경은 우선, 고구려가 수·당과의 오랜싸움을 통해 국력을 소모하였고 이때 신라의 국력이 급격히 신장하고 나당과 연합하게됨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이후 신라는 당의 세력을 축출하고 삼국통일을 완수하였다. 그러나 지방호족들의 독자적인 권력치중은 통일신라를 다시 후삼국으로 나뉘게 하고 역시 호족이었던 왕건(王建)에 의해 고려로 교체되어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삼국통일은 우리 민족이 하나의 국가 안에 통일됨으로 민족국가의 출발점이 되었고, 삼국의 문화를 수렴하여 보다 차원 높은 민족문화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중세사회

고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지방에는 독자적인 군사세력과 경쟁기반을 가진 호족들이 중앙의 통치력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고려왕조는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하여 지방세력을 통제하는 동시에 중앙관리로 등용하는 정책을 폈으며 과거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고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받아들이는 등 안정된 사회를 이루어 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귀족정치의 전개는 사회모순을 축척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권력과 부의 편중은 차별받던 무신들의 난을 야기하고 이것은 사회를 붕괴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정권은 무신들에게 넘어가고 사회는 점점 혼란스러워졌으며 이 틈을 타서 농민과 천민들의 신분해방운동이 일어났다.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고려는 결국 몽고의 침략을 받아 함락하고 만다. 이때 삼별초가 끝까지 남아 저항하였으나 전멸되고 몽고가 세운 원은 끊임없이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이시기에 고려사회에는 원을 지지하는 권문세족들이 등장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민왕이 원이 쇠하는 틈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반원개혁을 추진하여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성공하였다. 개혁정치를 단행하던 공민왕은 권문세족들을 제거하려다 끝내 그들에게 살해당했으며, 이에 맞서 세력이 커진 신흥사대부들은 권문세족들을 제거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


 

근세사회

조선이 건국된 뒤에는 국왕중심의 집권체제가 확립되어 갔다. 조선초기에는 민족의식이 고취되고 부국강병이 매우 강조되었으니 그결과 한글이 창제되고 영토가 확장되었다. 조선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굳혔고 신분의 차이가 뚜렷했으며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발달하였다. 따라서 토지의 사적소유가 많아지고 농민의 지위가 상승되었다. 사상계도 많은 변화를 일으켰으며 중앙정치는 의정부와 육조가 기본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발달과 비교적 안정된 사회의 내부에는 조선시대 불안정한 부의 축적과 당파싸움을 야기하고 있었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그들은 끊임없이 정권분립과 세력다툼을 하였고, 이러한 무렵 16세기 후반부터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동에 따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왜란과 호란은 16세기 이래 해이해지던 조선의 통치체제를 결정적으로 붕괴하는 계기가 되었고 따라서 문란해진 통치기구와 세금제도를 개편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성실한 농민이 부농으로 부상하기도 하고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수공업과 광업의 발달이 현저해졌으며 자연히 종래의 신분은 붕괴되어 갈 수 밖에 없었다 . 이와 더불어 새롭게 근대지향적인 실학사상이 등장하여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당파싸움은 여전히 진행되었고 세도정치는 사회의 부패를 불러 세금제도의 문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가운데 많은 양반과 농민들은 몰락해버리고 일부 몰락한 농민들은 도둑이 되거나 민란을 일으켰다. 농민들의 항쟁은 조선의 양반사회를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 이런 혼란속에서 예언사상이 유행했고 천주교가 들어와 유포되었으며 동학이 창도되어 핍박받는 농민사이에 열열히 신봉되었다. 이 새로운 사상들은 그 현실부정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당시 빈발하던 민란에 혁명적인 기운을 불어넣는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근대사회

동요하던 조선 후기의 사회는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정비될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이무렵 서양으로 부터 제국주의 열강의 통상 압력이 미쳐왔고 조선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대원군은 여기에 강력한 쇄국정책을 고수하였으며 통상에 불응하였지만 결국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개항한다. 

개항 이후 조선은 일본과 청으로부터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개항은 순수한 문명개항의 성격이 아니라 수탈의 발판으로서 삼자는 열강들의 목적이 뒤에 있었다. 열강들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고 잇권에 개입하기 시작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이권쟁탈전쟁을 한반도에서 벌이기까지 했다. 이에 반발한 조선의 국민들은 동학운동을 봉기하는 등 항쟁운동을 벌였다. 또한 자발적으로 개혁운동을 일으켜 정치 경제 사회를 완전히 개혁하기도 했으나 조선의 정권은 차츰 일본인들의 손으로 넘어가 결국은 한일합방이 되고 말았다. 

한일합방으로 인해 조선민들이 겪어야 하는 수난은 상상할 수 도 없는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내세워 본격적으로 수탈정치를 시작하고 국내에서의 항쟁은 어려워져만 가고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펼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항일운동가들과 조선인들은 더욱 강경하게 대항하여 3.1운동을 일으키고 중국일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상해에 한국임시정부를 새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5년 8.15일, 항일운동과 상관없이 일제가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2차대전이 종결되고 조선은 35년만에 광복을 맞는다. 이러한 광복의 이면에는 꾸준한 항일독립운동의 바탕도 있었으나 연합군의 승리라는 타력이 개재되어 있었고 이것은 현대사를 규정짓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