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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는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에 실패하자 다시 당나라와의 관계강화를 위하여 648년에 당나라에 파견되어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
김춘추에 의한 친당정책은 650년에 신라가 중고시대 전기간을 통하여 계속 사용하여 오던 자주적인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신라의 연호로 채택한 데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김춘추는 귀국 후에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내정개혁을 주도하였는데, 649년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의 채택, 651년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正朝賀禮制)의 실시, 품주(稟主)의 집사부(執事部)로의 개편 등 한화정책(漢化政策)이 그것이다.
김춘추에 의하여 주도된 내정개혁의 방향은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하고 왕권강화를 실제적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진덕여왕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김춘추 자신이 즉위할 경우에 대비한 정치 작업으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친당외교와 내정개혁을 통하여 신장된 신귀족 세력의 힘을 기반으로 하여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화백회의에서 섭정으로 추대되었고, 그리고 그와도 일시적으로 제휴하였던 구귀족 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알천을 배제시키면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김춘추는 즉위에 있어서 그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되었던만큼 화백회의에 의하여 추대받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구귀족으로부터 신귀족으로의 권력이양과 왕위계승의 합법성 내지 정당성을 유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무열왕은 즉위하던 해에 우선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증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조를 개정하는 등의 율령정치(律令政治)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655년에 원자(元子)인 법민(法敏)을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는 한편 아들 문왕(文王)을 이찬으로, 노차(老且, 혹은 老旦)를 해찬(海飡)으로, 인태(仁泰)를 각찬(角飡)으로, 그리고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자기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656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김인문(金仁問)을 군주(軍主)에, 658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문왕을 집사부 중시(中侍)에 새로이 임명하여 직계친족에 의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의 즉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던 김유신에 대해서는 660년에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왕권을 보다 전제화(專制化)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태종무열왕이 즉위하기 이전인 중고시대의 상대등은 귀족회의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존재이거나 왕위계승 경쟁자로서의 자격이 있었던 것에 대하여,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이후에 왕의 측근세력인 김유신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상대등이 귀족세력의 대표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전제왕권과 밀착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대등 중심의 귀족세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으며 신라 중대사회에서는 전제왕권의 방파제 구실을 하는 행정책임자인 집사부 중시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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