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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5/08 조선 제 27대왕 순종
  2. 2008/05/08 조선 제 26대왕 고종
  3. 2008/05/08 조선 제 25대왕 철정
  4. 2008/05/08 조선 제 23대왕 순조
  5. 2008/05/08 조선 제 21대왕 영조
한국역사/조선 2008/05/08 16:35 by 美
순종(純宗)


1874(고종 11)∼1926.
조선왕조 마지막 제27대왕.
재위 1907∼1910.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척(拓),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1874년 2월 창덕궁의 관물헌(觀物軒)에서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 閔妃)의 둘째아들로 탄생하였다. 탄생 다음해 2월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82년(고종 19)에 민씨(閔氏, 뒷날의 純明孝皇后)를 세자빈으로 맞았다. 1897년 대한제국의 수립에 따라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4년 새로이 윤씨(尹氏)를 황태자비로 맞이하였다. 1907년 7월에 일제의 강요와 일부 친일정객의 매국행위로 왕위를 물러나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고,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황제(皇弟)인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립하였고, 그때까지 거처하던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4년간에 걸친 순종의 재위기간은 침략자 일본에 의한 한반도 무력강점공작에 의하여 국권이 점차적으로 제약되고, 마침내 송병준(宋秉畯)·이완용(李完用) 등 친일매국정객과 일본침략자의 야합으로 조선왕조 519년의 역사에 종언을 고하게 되는 경국(傾國)의 비사(悲史)와 민족사의 주권을 수호하려는 저항의 통사(痛史)의 시기였다. 순종이 즉위한 직후인 1907년 7월 일제는 이른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丁未七條約)을 강제로 성립시켜 국정 전반을 일본인 통감이 간섭할 수 있게 하였고, 정부 각부의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는 이른바 차관정치를 시작하였다.

내정간섭권을 탈취한 일본은 동시에 얼마 남지 않았던 한국군대를 재정부족이라는 구실로 강제해산시켜 우리 겨레의 손에서 총·칼의 자위조직마저 해체해 버렸다. 또한 1909년 7월에는 기유각서에 의하여 사법권마저 강탈해버렸다. 이처럼 순종을 허위(虛位)의 황제로 만들어버린 이토(伊藤博文)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 소네(曾彌荒助)를 거쳐 군부출신의 데라우치(寺內正毅)가 조선통감으로 부임해 온 뒤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숨통을 끊고자 더욱 거센 공작을 펴게 되었다. 일제는 1909년 7월 각의(閣議)에서 ‘한일합병 실행에 관한 방침’을 통과시킨 뒤 한국과 만주문제를 러시아와 사전협상하기 위하여 이토를 만주에 파견하였다. 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安重根)에 의하여 포살되자 이를 기화로 한반도 무력강점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일제는 이러한 침략에 부화뇌동하는 친일매국노 이완용·송병준·이용구(李容九) 등을 중심한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앞세워 조선인의 원에 의하여 조선을 합병한다는 미명하에 위협과 매수로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고 한반도를 무력강점해버렸다.

야만적인 침략행위에 우리 겨레는 순종즉위 전부터 의병투쟁으로 대항하는 한편, 개인적인 의거로 맞섰으며, 또한 민족의 저력을 키워 일제와 대항하여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강경과 온건의 민족저항의 역량이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고, 일부 친일매국노의 암약으로 나라를 그르치게 되었던 것이다. 순종 주변에는 친일매국대신과 친일내통분자만이 들끓는 가운데, 국가최고의 수렴자로서의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한이 남았다. 일제는 무력을 배경으로 원색적인 침략수단을 다하였고, 교묘하게 이들 친일매국세력을 조종하여 민족의 저항역량을 저해하였던 것이다.

대한제국이 일제의 무력 앞에 종언을 고한 뒤, 순종은 황제의 위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 이왕(昌德宮李王)으로 예우하는 조처가 취해졌고, 왕위의 허호(虛號)는 세습되도록 조처되었다. 폐위된 순종은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었다. 1926년 4월 25일에 죽고 6월에 국장을 치러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의 유릉(裕陵)에 안장되었다. 순종의 인산례(因山禮)를 기하여 6·10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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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조선 2008/05/08 16:33 by 美

고종(高宗)

1852(철종 3)∼1919.
조선 제26대왕.
재위 1864∼1907.
본관은 전주(全州).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후에 형(㷗)으로 개명, 자는 성임(聖臨), 후에 명부(明夫)로 개자(改字)하였다. 호는 성헌(誠軒).



1. 가계·왕위계승 시말


영조의 현손(玄孫)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이다. 1852년 음력 7월 25일 정선방(貞善坊)소재의 흥선군 사제에서 출생하였다. 즉위 후인 1866년 9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이가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고종이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1863년 즉위하게 된 것은 아버지 흥선군과 익종비(翼宗妃) 조대비(趙大妃)와의 묵계에 의해서였다. 순종·헌종·철종 3대에 걸쳐 세도정치를 한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철종의 후사가 없자 뒤를 이을 국왕 후보를 두고 왕손들을 지극히 경계하였다. 이때 안동김씨 세도의 화(禍)를 피하여 시정(市井)무뢰한과 어울리고 방탕한 생활을 자행하며 위험을 피하던 이하응은 조성하(趙成夏)를 통하여 궁중 최고의 어른인 조대비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재빨리 흥선군의 둘째아들 명복으로 하여금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여 그를 익성군(翼成君)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하여 국왕에 즉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높여 국정을 총람, 대섭하게 하였다. 고종은 장성하매 친정(親政)의 의욕을 가지고 차차 흥선대원군과 대립하게 되었고, 이 뜻을 헤아린 민비와 노대신들은 유림을 앞세워 대원군 하야공세를 폈다. 1873년 마침내 서무친재(庶務親裁)의 명을 내려 흥선대원군에게 주어졌던 성명(成命)을 환수하고 통치대권을 장악하였다.



2. 개화당과 수구세력간의 갈등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정권은 민비의 척족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민씨척족정권은 흥선대원군이 취하였던 강력한 척사양이정책(斥邪壤夷政策)과는 달리, 안으로 정계 일부에 자라고 있던 대외개방의 움직임과 밖으로 근대 일본의 국교요청(國交要請)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어 새로운 국교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계속하여 구미 열강과도 차례로 조약을 맺어 통교관계를 가지는 개항정책을 실행하였다. 고종과 민씨정권은 개항 후 일련의 개화시책을 추진하여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는 한편,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과 수신사(修信使)를 계속 파견하였다. 또한, 부산·원산·인천 등 각 항을 개항하고 개화문명을 수용하는 정책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개화시책을 틈타 일본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침투해오자, 국내에서는 개화와 수구의 정견을 달리하는 두 파의 대립이 점차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1881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 朝鮮策略》의 유입, 반포를 계기로 위정척사파는 마침내 신사척사상소운동(辛巳斥邪上訴運動)을 일으켜 민씨정부규탄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때 안기영(安驥永) 등에 의하여 국왕의 이복형인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이재선(李載先)을 국왕으로 옹립하고자 하는 국왕폐립음모(國王廢立陰謀)가 꾸며졌으나, 고변(告變)에 의하여 사전에 적발되어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민씨정권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탄압하여 정국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변법(變法)에 의한 근대국가 건설을 추진하는 개화당과 기존 구체제의 유지를 고집하는 수구세력간의 알력으로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청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하니 자주권에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구식군대의 세력을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하였고,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궁중을 습격한 개화세력의 압력으로 고종은 그들에게 정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는 등 왕권은 큰 도전을 받았다. 임오군란 이후 친청화(親淸化)한 민씨정권은 계속 국정을 논단하면서도 급격한 동북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안으로는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였다.



3. 흥선대원군의 등장과 명성황후 시해사건


또 한편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문제를 둘러싸고 교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埈鎔) 등이 동학도와 내통하면서 고종을 시해할 음모를 꾸몄으나 고변하는 자가 있어 무위로 끝나 안전할 수 있었다. 갑오경장 초기 은퇴중이던 흥선대원군은 일부 개혁세력 추대를 받아들여 궁중에 들어가서 고종으로부터 정치적 실권을 위임받았다. 개혁주도세력과 일본공사 등은 흥선대원군의 직접간여를 꺼려 그의 실권은 거세한 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중심으로 갑오개혁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해 홍범14조(洪範十四條)를 제정하여 자주독립을 종묘에 서고(誓告)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이 진행되면서부터 노골적인 침략적 간섭과 이권탈취에 혈안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 고종은 점차 일본을 혐오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후 3국간섭으로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일본의 압력을 배제하고자 친로정책(親露政策)을 펴게 되었다. 이에 일본공사(日本公使:三浦梧樓)는 친일정객과 짜고 을미사변을 일으켜 왕궁을 습격, 민비를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폭거를 자행하였다. 을미사변으로 고종은 왕비를 잃었으며, 일본의 압력으로 폐서인(廢庶人)조처까지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뒤 민씨 복위의 조서(詔書)를 내려 비의 전을 태원전(泰元殿)에 설치한 뒤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택되고, 비로소 홍릉(洪陵)에 국장되었다(1919년 金谷陵으로 옮김.).



4.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성립


이보다 앞서 1884년 러시아와 조러통상조약을 체결한 뒤 러시아가 적극적인 접촉을 벌여오자, 고종은 당시 갑신정변 직후에 벌어지고 있던 청·일 양국군의 서울 진주와 충돌 등에 자극받아 난국을 타개하고자 러시아와 비밀리에 밀약을 추구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밀사를 거듭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침투공작을 편 일이 있었다. 이러한 밀약공작은 안으로는 민씨정권과 밖으로는 청·일의 간섭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하여 군사적 압력과 정치적 간섭을 강화하자, 고종은 친일세력을 물리치고자 친러정객과 내통하고 1896년 2월 돌연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친러정부가 집정하면서 열강에게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국가의 권익과 위신이 추락하고 국권의 침해가 심하여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선양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종은 1897년 2월 환궁하였으며, 10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5. 을사조약 체결과 실권(失權)


1898년 7월 안경수(安駉壽)는 현역과 퇴역군인들을 동원한 황제양위를 음모하였다. 또, 9월에는 정계를 농락하다 유배된 김홍륙(金鴻陸)이 독다사건(毒茶事件)을 일으키는 등 고종 신상에 거듭 위험이 닥쳤으나 무사하였다. 그 무렵 독립협회 회원을 중심으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맹렬하게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보부상과 군대의 힘을 빌려 이를 진압하였다. 고종은 1900년 둘째아들을 의친왕(義親王), 셋째아들을 영친왕(英親王)에 봉하고, 1901년 순빈 엄씨(淳嬪嚴氏)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져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이 격렬해지는 가운데 장호익(張浩翼) 등이 황제폐립을 음모하였으나 무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군사적 압력하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제1차한일협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고,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마침내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고종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을사오적의 친일대신들에 의하여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대하여 고종은 미국에 조약의 무효를 호소하고자 하여, 1905년 11월 26일자로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청국 즈푸(芝罘)를 경유하여 전 미국공사이며 한국정부의 고문으로 있었던 헐버트(Hulbert)에게 밀서를 보내어 미국정부에 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미 필리핀에서 미국의 우월권을 인정받는 대신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는 가쓰라·태프트협정(桂·Taft協定)을 체결한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국정에 전반적으로 간여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고종은 마침내 한국문제를 국제정치의 마당에 호소하고자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이상설(李相卨:전 의정부참찬)·이준(李儁:전 평리원검사)·이위종(李瑋鐘:주러조선공사관서기관)을 파견하였다. 한편, 러시아황제 니콜라스 2세에게 친서를 보내어 이들 특사활동에 원조해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고종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완용(李完用)·송병준(宋秉畯) 등 일제에 아부하는 친일 매국대신들과 군사력을 동반한 일제의 강요로 한일협약 위배라는 책임을 지고 7월 20일 퇴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의 뒤를 이어 순종이 즉위하였으며, 고종은 태황제(太皇帝)가 되었으나 실권이 없는 허위(虛位)였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정월에 사망하였다.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하였다는 풍문이 유포되어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인산례(因山禮)로 국장이 거행될 때 전국 각지에서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능은 홍릉(洪陵:金谷)이며, 저서로는 《주연집 珠淵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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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조선 2008/05/08 15:54 by 美

철종(哲宗)

1831(순조 31)∼1863(철종14).
조선 제25대왕.
재위 1849∼1863.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변(昪).
초명은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로, 전계대원군 광(全溪大院君$광01)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사이의 셋째아들이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純祖妃, 金祖淳의 딸)의 명으로,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나이 19세였으며,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군으로서,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 명(懷平君 明)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명을 받아 봉영의식(奉迎儀式)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한 뒤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농경을 하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으므로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51년(철종 2)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明純王后)로 맞았다. 그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어 국구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또다시 계속된 셈이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하였는데, 이듬해 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대책으로 선혜청전(宣惠廳錢) 5만냥과 사역원삼포세(詞譯院蔘包稅) 6만냥을 진대(賑貸)하게 하였고, 또 그해 여름에 한재가 심하자 재곡이 없어 구활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겨 재용(財用)의 절약과 탐묵(貪墨)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약 1, 000호의 여주의 민가에 은자(銀子)와 단목(丹木)을 내려주어 구활하게 하였고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 000냥을 지급하였으며, 이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2, 000냥, 단목 2, 000근, 호초(胡椒)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구호책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일족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이 때문에 삼정(三政:田政·軍政·還穀)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횡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마침내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발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라는 임시 특별기구를 설치하고,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구폐(三政救弊)를 위한 정책을 수립, 시행하게 하는 한편, 모든 관료에게 그 방책을 강구하여 올리게 하는 등 민란수습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뿌리 깊은 세도의 굴레를 벗어나 제대로 정치를 펴나갈 수 없었다.

이와같은 사회현상에서 최제우(崔濟愚) 가 동학(東學)을 창도하여 사상운동을 전개, 확산시키자 이를 탄압, 교주 최제우를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를 씌워 처형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수용(睟容) 4본이 천한전(天漢殿)에 봉안되었으며,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范氏)소생의 영혜옹주(永惠翁主)하나가 있어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출가하였을 뿐 후사가 없었다. 1865년(고종 1) 4월 7일 경기도 고양의 희릉(禧陵)오른편 언덕에 예장되고, 능호를 예릉(睿陵)이라 하였다. 시호는 문현 무성 헌인 영효(文顯武成獻仁英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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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조선 2008/05/08 15:45 by 美

순조(純祖)


1790(정조 14)∼1834(순조 34).
조선 제23대왕.
재위 1800∼1834.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공(玜).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

1790년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昌慶宮集福軒)에서 정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이다. 1800년(정조 24)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고, 이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월에 11세의 어린 나이로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니,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英祖繼妃 慶州金氏)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다. 1802년(순조 2) 10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왕비(王妃:純元王后)로 맞았다.

1801년 대왕대비는 궁방(宮房)과 관아(官衙)에 예속되어 있던 공노비(公奴婢)를 혁파하고 서얼유통(庶孼流通)을 시행하는 한편, 정조 때부터 집권해오던 시파(時派)에게 보복하기 위해서 사교금압(邪敎禁壓)이라는 명분으로 200여명의 천주교신자들을 학살할 때 시파를 모두 숙청하였다(辛酉迫害). 한편, 왕의 친정 뒤에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1815년에는 경상·충청·강원도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 죽이고(乙亥迫害), 1827년에도 충청·전라도의 교인들을 검거해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다.

1804년 12월 대왕대비가 물러남으로써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정조의 유탁(遺託)을 받고 정치에 관여하게 된 국구(國舅)김조순 일문에 의한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권이 확립되어, 김이익(金履翼)·김이도(金履度)·김달순(金達淳)·김희순(金羲淳)·김명순(金明淳) 등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하여 전횡(專橫)과 뇌물을 받는 행위를 일삼으니, 인사제도의 기본인 과거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정치기강이 무너져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각종 비기(秘記)와 참설(讖說)이 유행하는 등 사회혼란이 일어났다. 이를 틈타서 1811년 평안도 용강(龍岡)사람인 홍경래(洪景來)와 그 무리가 반란을 일으켜 평안도일대를 점령한 뒤 관군과 대결하였으나, 이듬해 4월 정주성(定州城)이 함락됨으로써 난은 평정되었다. 그러나 이해에 한성에 도적과 거지떼가 들끓었고, 1813년 제주도의 토호 양제해(梁濟海)와 1815년 용인의 이응길(李應吉)이 민란을 일으켰다.

1817년에는 유칠재(柳七在)·홍찬모(洪燦謨) 등의 흉서사건(凶書事件), 1819년에는 액예(掖隷)와 원예(院隷)의 작당 모반운동(謀叛運動), 1826년에는 청주에서 괘서사건(掛書事件)이 일어났으며, 1821년에는 서부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1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재위 34년 중 19년에 걸쳐 수재(水災)가 일어나는 등 크고 작은 천재지변이 잇달아 발생하였다.

한편 왕은 《양현전심록 兩賢傳心錄》·《사부수권 四部手圈》·《대학유의 大學類義》·《정조어정홍재전서 正祖御定弘齋全書》·《서운관지 書雲觀志》·《동문휘고 同文彙考》 등을 간행하게 하고,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는 등의 치적이 있었다. 또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서 풍양조씨(豊壤趙氏)일문을 중용하고, 1827년 세자(世子:翼宗)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함으로써 안동김씨의 세도를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1830년 세자가 일찍 죽음으로써 실패하였다. 1834년(순조 34) 11월 45세로 죽으니 수용(睟容)4본이 있어 경모궁망묘루(景慕宮望廟樓)·경우궁성일헌(景祐宮誠一軒)·선원전(璿源殿)·영희전(永禧殿)에 각각 봉안하였으며, 경기도 광주에 장사지내고 인릉(仁陵)이라 이름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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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조선 2008/05/08 13:23 by 美

영조(英祖)

1694(숙종 20)∼1776(영조 52).
조선 제21대 왕.
재위 1724∼1776.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이름은 금(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1. 가계와 왕세제 책봉


아버지는 숙종이고,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이며,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1699년(숙종 25) 연잉군(延礽君)에 봉하여지고, 1721년(경종 1)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1721년 숙종에 이어 경종이 즉위하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고 또 아들이 없었다. 그해 노론측 정언 이정소(李廷熽)는 경종에게 후계자를 먼저 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영중추부사 이이명(李#이96命) 등 이른바 노론 4대신은 숙종의 제2계비 김대비(金大妃:仁元王后)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들 노론측은 경종이 병환이 많고 효종·현종·숙종의 3대에 해당하는 혈통(三宗血脈)은 경종을 제하고는 왕제(王弟)인 연잉군밖에 없음을 들어 왕제를 세제로 책봉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그런데 왕제의 세제책봉으로 기울어지자 연잉군은 소를 올려 왕세제의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다. 그리고 소론측인 우의정 조태구(趙泰耉)를 비롯, 사간 유봉휘(柳鳳輝) 등도 시기상조론을 들어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국 노론측 대세에 밀려 연잉군이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2. 대리청정 문제와 노론 소론 대립


이제 왕세제로 기반을 다지게 된 노론의 입장에서는 좀더 실권을 잡기 위해서 대리청정(代理聽政)까지 들고 나오기에 이르렀다. 먼저 노론측은 집의 조성복(趙聖復)을 앞세워 왕세제의 대리청정에 대한 정당한 명분을 주장하게 하였다. 그의 주장은 경종이 병이 많고, 또 1717년(숙종 43)에 숙종이 경종에게 대리청정하게 한 정유고사(丁酉故事)를 들어 왕세제에게도 대리청정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경종은 노론측 주장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일단 허락하였다.

그러자 소론의 찬성 최석항(崔錫恒), 우의정 조태구 등이 읍간으로 대리청정의 허락을 취소시켜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어 중앙조정은 물론 지방의 감사·수령·찰방과 성균관학생 및 각도의 유생들까지도 소를 올려 대리청정의 회수를 간청하고 나섰다. 또한, 청정명령을 받은 왕세제도 네번이나 청정명령의 회수를 청하였다. 그러자 노론측 중신들도 의례상 백관의 정청(庭請)을 베풀고 대리청정의 회수를 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자신의 명분을 세운다는 입장에서 “나의 병이 언제 나을지 모르니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하교를 내렸다. 그러자 노론측 여러 중신들은 대리청정이 굳어진 것으로 판단, 청정명령을 거두라는 정청의식을 파하였다.

이어 노론측은 연명으로 왕명을 좇는다는 명분으로 숙종 말년의 정유청정의 절목에 따라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청하는 의례적 차서(箚書)를 급히 올렸다. 노론측의 태도가 이와같이 변하자 당황한 경종은 소론 대신 조태구를 불러들여 일의 해결을 다시 요청하였다.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조태구는 “1717년의 정유청정은 숙종이 춘추가 높은 데다가 병이 중하여 부득이하여 그런 것이나 지금 왕세제의 대리청정 주장은 전하(殿下:경종)의 보령이 겨우 34세이고, 즉위한 지도 1년밖에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 전하의 병환과는 형세가 판연히 다르므로 청정명령은 부당하다.”고 극간하였다. 조태구의 주장에 노론 대신들도 다른 명분이 없게 되었다. 이에 노론의 입장에서는 전번에 올린 대리청정을 허락하여줄 것을 청하였던 연명 차서가 잘못임을 인정, 또다시 청정명령의 환수를 청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가 청정명령을 거두라는 정청을 베풀고, 이어 다시 연명 차서로 청정을 요구하였다가 결국, 환수의 요청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노론측의 태도 변화는 신하로서 일관된 명분을 보여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론측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고 또 그들에게 가장 큰 입지를 마련하여주는 결과가 되었다.



3. 신축옥사 임인옥사


결국 1721년 기회를 잡은 소론들은 대리청정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을 보내는 신축옥사를 주도하였다. 이듬해 기세를 몰아 소론의 영수 김일경(金一鏡) 등은 남인 목호룡(睦虎龍)을 시켜 임인옥사를 일으켰다. 이때 소론측은 노론이 삼수역(三守逆:경종을 시해하기 위한 세가지 방법)까지 꾸며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왕세제도 이 모역에 가담하였다는 것이다. 임인옥사를 주도한 소론들은 노론 4대신을 비롯한 60여명을 처형시키고 관련자 170여명도 유배 또는 치죄를 하는 대대적인 노론 축출을 단행하였다. 이때 임인옥안에 왕세제의 혐의도 함께 기록되었다. 이무렵 김일경 등은 또 내관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 등을 시켜 왕세제를 보필하던 장세상(張世相)을 몰아내고, 심지어는 왕세제가 형인 경종에게 문안하러 가는 것조차 막았다.

왕세제는 자신의 지지기반이던 노론이 축출되고 신변에 위협까지 받게 되자 계모인 김대비에게 사위(辭位)도 불사하겠다고 호소하였다. 김대비는 이러한 정국(政局)을 깊이 인식, 평소 노론측 입장에 서서 왕세제를 감싸왔으므로 왕세제의 간절한 사정까지 담은 언교(諺敎)를 몇 차례 내려 소론측의 반발을 누그러뜨렸다. 1724년 경종이 죽자 영조는 무사히 등극하게 되었다.



4. 즉위 후의 탕평책


노론·소론의 당론에 처하여 생명의 위협까지 받은 뒤 1724년에 즉위한 영조는 바로 탕평정국의 서곡인 붕당의 폐해를 하교하였다. 영조가 탕평책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은 아마도 세제로 책봉된 뒤부터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가 왕세제로 책봉된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노론·소론의 당론이 심화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거기에 휘말렸으며, 그 때문에 생명의 위협까지도 받았기 때문이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소론의 영수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자들을 숙청하였다. 그리고 1725년(영조 1)에는 을사처분(乙巳處分)으로 노론을 다시 정계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영조가 의도하였던 탕평정국과는 달리 노론내 강경세력인 준론자(峻論者)들은 소론에 대한 공격을 일삼는 등 또다시 노론·소론의 파쟁으로 흘러가자 1727년에는 노론내 준론세력들을 축출하였다. 곧 이어 1729년에는 기유처분(己酉處分)으로 노론·소론내 탕평세력을 고르게 등용, 초기의 탕평정국을 이루었다. 이때 인사정책으로 쌍거호대(雙擧互對)의 방식을 취하였다. 예컨대 노론 홍치중(洪致中)을 영의정으로 삼으면 소론 이태좌(李台佐)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의 인적 구성에 있어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金在魯)를 맡기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宋寅命), 참의에 소론 서종옥(徐宗玉), 전랑에 노론 신만(申晩)으로 상대하게 한 것이 그것이다.

그뒤 영조 자신의 의도대로 정국을 수습하게 되자 기초를 다진 왕권으로 쌍거호대의 방식을 극복,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인사정책을 단행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재능에 관계없이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노론·소론만 등용하다가 탕평정국이 본궤도에 오르자 이의 정착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려는 방향으로 그 기반을 강화시켜나갔다. 이러한 정국구도에 따라 노론·소론·남인·소북 등 사색을 고르게 등용, 탕평정국을 확대시켜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시행과정에서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즉위 후 을사처분으로 노론을 불러들여 왕위정통성 확보와 탕평정국을 급히 서두르다가 1728년에는 정계에서 밀려난 소론측의 반발세력인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겪었고, 1755년에는 을사처분 때 귀양을 가서 20여년 동안이나 한을 품어온 소론 윤지(尹志) 등이 주동, 나주에 괘서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듬해 토역과(討逆科)를 보일 때 그 답안지에 소론계 인물들이 조정을 비방하는 글을 써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762년에는 탕평책에 따라 다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남인과 노론 명분 속에 미약한 권력을 유지하여 온 소론 등이 장헌세자(莊獻世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노론측 김한구·홍계희(洪啓禧) 등이 나경언(羅景彦)을 사주하여 장헌세자의 비행(祕行)과 난행(亂行)을 고발하게 하여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5. 형률의 완화


한편, 1725년 영조는 압슬형(壓膝刑)을 폐지하고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추형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1729년 사형수에 대해서는 삼복법(三覆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신중을 기하게 하였으며, 1774년 사문(私門)의 용형(用刑)도 엄금시켰다. 그리고 남형(濫刑)과 경자(鯨刺)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시켜 인권존중을 기하고 신문고제도(申聞鼓制度)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



6. 경제정책


또한 영조는 경제정책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1725년 각 도의 제언(堤堰)을 수축, 한재에 대비하였고, 1729년에는 궁전 및 둔전에도 정액을 초과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과세를 시켰다. 한편 오가작통(五家作統) 및 이정(里定)의 법을 엄수하게 하여 탈세방지에 힘썼다.

그런데 영조 재위 때에 그가 시행한 경제정책 중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바로 균역법(均役法)의 시행이었다. 이 균역법의 시행으로 양역(良役)의 불균형에 따른 일반 백성들의 군역(軍役)부담이 크게 감소되었다. 균역법을 성립시키는 과정에서 영조는 우선 조현명(趙顯命) 등에게 〈양역사정 良役査正〉을 올리게 하는 한편, 1750년에는 친히 홍화문에 나가 오부방민(五部坊民)을 만나 양역개정에 대한 여론을 수집하는 의지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 균역법 시행의 가장 큰 의의는 어느 정도 전국적인 양정수(良丁數)의 파악이 실제로 시도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실제 파악작업은 조선 건국 이래 처음 시도된 것으로 왕권과 양반신분 및 농민층의 이해관계가 얽힌 군역문제 해결에 있어서 지배층의 양보를 강요하면서까지 민생을 위한 개선책을 도모하였다는 데에도 큰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영조는 각 도에 은결을 면밀히 조사하게 하고 환곡분류법(還穀分類法)을 엄수하게 하는 등 환곡에 따른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1763년에는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갔던 조엄(趙曮)이 고구마를 가져옴으로써 한재시에 기민을 위한 구황식량을 수급하는 데 획기적인 일익을 담당하였다.



7. 사회정책


한편, 사회정책을 실시, 신분에 따른 역(役)을 더욱 명백히 하였다. 양인들의 불공평한 양역에 따른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균역법의 시행은 물론 천인들에게도 공사천법(公私賤法)을 마련하였다. 1730년에 양처(良妻)소생은 모두 모역(母役)에 따라 양인이 되게 하였다가 이듬해에는 남자는 부역(父役), 여자는 모역에 따르게 하여 양역을 늘리는 방편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서얼차대(庶孽差待)로 사회참여의 불균등에 의한 불만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서자도 관리로 등용시키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영조는 그의 생전의 신념으로 이끌었던 탕평정국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서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는 서원·사우(祠宇)의 사건(私建) 또는 사향(私享)을 금지시켰다. 또 1772년에는 과거시험도 탕평과(蕩平科)를 처음 시행하는 특례를 보였고, 같은해는 동색금혼패(同色禁婚牌)를 집집의 대문에 걸게 함으로써 당색의 결집에 대한 우려를 환기시켰다.



8. 국방정책


영조는 즉위한 이듬해에 주전(鑄錢)을 중지시키고 군사무기를 만들게 하였다. 1729년에는 김만기(金萬基)가 만든 화차(火車)를 고치게 하였으며, 이듬해는 수어청(守禦廳)에 명하여 조총(鳥銃)을 만들게 하여 군기(軍器)의 수급에 만전을 기하게 하였다. 그리고 전라좌수사 전운상(田雲祥)이 제조한 해골선(海鶻船)을 통영(統營) 및 각 도의 수영(水營)에서 만들도록 하여 임진왜란 때 떨쳤던 해군력을 계승, 더욱 발전시키도록 하였다.

한편 북방 변방 및 요새 구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727년에는 북관군병(北關軍兵)에게 총을 복습하게 하였고, 1733년에는 평양중성(平壤中城)을 구축하게 하였다. 그리고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을 개축, 이듬해 완성하였다.



9. 문화진흥정책


영조는 자신이 학문을 즐겼기 때문에 스스로 서적을 찬술하였으며, 인쇄술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 필요한 것은 널리 반포시켜 일반백성들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1729년 《감란록 勘亂錄》을 반사(頒賜)하고 이듬해 《숙묘보감 肅廟寶鑑》을 편찬시켰다. 1732년 이황(李滉)의 학문세계인 《퇴도언행록 退陶言行錄》을 간행하여 올리게 하였다. 1736년에는 조선왕조의 근본법전인 《경국대전》을 수명(修明)시킴과 동시에 여성을 위한 《여사서 女四書》를 언역(諺譯)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1742년에 《천문도 天文圖》·《오층륜도 五層輪圖》를 모성(模成)시켰으며, 이듬해에는 균역법의 전형인 《양역실총 良役實摠》을 각 도에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1754년 《소학훈의 小學訓義》·《속오례의 續五禮儀》를 편찬하였고, 《경국대전》을 수명한 뒤 새로이 제도적으로 바뀐 것을 반영하여 《속대전》을 만들었다. 1747년 《황단의궤 皇壇儀軌》를 편찬한 뒤 이듬해에는 백성들을 다스릴 때 법을 선용하라는 취지로 만든 관리들의 필독서 《무원록 無寃錄》을 필삭, 훈석을 가하게 하여 각 도에 반포하게 하였다. 1749년에는 《속병장도설 續兵將圖說》, 1753년 《누주통의 漏籌通義》를 편찬하였다. 이듬해에는 영조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천명하는 《천의소감 闡義昭鑑》을 이룩, 이를 내외에 반포하였다.

1747년에는 《삼국기지도 三國基址圖》·《팔도분도첩 八道分圖帖》·《계주윤음 戒酒綸音》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1765년 《해동악장 海東樂章》을 만들고, 《여지도서 輿地圖書》를 인간(印刊)하게 하였으며 각 도의 읍지도 모으게 하였다. 한편 177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를 만들어 오늘날 《증보문헌비고》의 골간을 이룩하였다. 또한, 영조가 여러 권의 책을 친제(親製)하기도 하였다. 악서(樂書)의 전범(典範)인 《악학궤범》의 서문을 지었으며, 스스로를 되돌아본 《어제자성편 御製自省編》을 지었다. 그리고 1754년에는 무신들을 위하여 《위장필람 爲將必覽》을 저술, 이를 무신들에게 인반(印頒)하게 하였다. 이밖에도 《어제경세문답 御製警世問答》·《어제경세편 御製警世編》·《백행원 白行源》·《어제소학지남 御製小學指南》·《팔순유곤록 八旬裕崑錄》·《어제조손동보 御製祖孫同譜》·《어제효제권유문 御製孝悌勸諭文》 등이 있다. 이 당시 재야에서 실학(實學)이 확대되면서 실학자들의 서적도 편찬, 간행되었다. 1765년 북학파 홍대용(洪大容)의 《연행록 燕行錄》이 편찬되고, 1769년에는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 磻溪隨錄》이 간행되었다. 또한 신경준(申景濬)의 《도로고 道路考》도 1770년에 편찬되었다. 영조는 친히 호학하였기 때문에 신학풍에 대한 이해도 깊었을 뿐만 아니라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진작시키기도 하였다.

영조는 왕세제 때부터 당론에 휘말려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자신이 처한 위치를 슬기로운 탕평정국으로 이끌어나가면서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한 영주(英主)였다. 1776년 83세로 죽으니 조선시대 역대왕 가운데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52년이나 되었다. 처음에 올린 묘호(廟號)는 영종(英宗)이었으나 뒤에 영조로 고쳐 올렸다. 능은 양주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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