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조
(宣祖)

1552년(명종 7)∼1608년(선조 41).
조선 제14대왕.
재위 1567∼1608.
초명은 균(釣),
뒤에 공으로 개명하였다.



1. 가계와 수업


1552년 11월 11일 한성(漢城) 인달방(仁達坊)에서 출생하였다. 중종의 손자이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초13)의 셋째아들이고, 어머니는 증영의정(贈領議政) 정세호(鄭世虎)의 딸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는 김제남(金悌男
)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명종의 사랑을 받았으며 성장하자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고, 1567년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즉위하였다. 즉위 초년에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여 매일 강연(講筵)에 나가 경사(經史)를 토론하였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여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만년에는 특히 《주역》 읽기를 좋아했다.



2. 치적


훈구세력(勳舊勢力)을 물리치고 사림(士林)들을 대거 등용하였으며, 명유(名儒) 이황(李滉)과 이이(李珥) 등을 극진한 예우로 대하여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일으키고자 힘을 다하였다. 당시 사유(師儒)를 선발함에 문사(文詞)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두드러져 있는 데다 관리를 뽑는 데도 오직 과거에 의거하여 선비의 습속이 문장에만 치우치게 되어 이러한 병폐를 없애기 위하여 학행(學行)이 뛰어난 사람을 발탁하여 각 고을을 순행하며 교회(敎誨)에 힘쓰도록 하였다.


한편, 유일(遺逸)을 천거하도록 하여 징사(徵士) 조식(曺植)·성운(成運) 등 유능한 인재는 관계(官階)에 구애받지 않고 초서(超敍)하기도 하였으며, 《유선록 儒先錄》·《근사록 近思錄》·《심경 心經》·《소학》 등 치도(治道)에 관계되는 서적과, 윤기(倫紀)를 부식(扶植)하기 위하여 《삼강행실 三綱行實》을 짓도록 하고 이것을 모두 간행하여 널리 읽히도록 하였다.


또,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에게 증직(贈職)하는 등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림들을 신원(伸寃)하고 그들에게 해를 입힌 남곤(南袞) 등의 관작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으며,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유관(柳灌) 등을 죽이고 녹훈(錄勳)의 영전(榮典)까지 받았던 이기(李#기59)·윤원형(尹元衡) 등을 삭훈(削勳)하였다.


또한, 명나라 《대명회전 大明會典》 등 중국의 역사에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후예라는 그릇된 사실이 선조대까지 200년간이나 전해내려온 것을 윤근수(尹根壽)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시정하도록 하였다.



3. 당쟁과 국론분열


그러나 선조대에 들어와 정국을 주도하던 사림들이 1575년(선조 8)에 이르러 김효원(金孝元)·심의겸(沈義謙)을 각각 중심인물로 하는 당쟁이 시작되어 동인(東人)·서인(西人)으로 분당되었으며, 정론(政論)이 둘로 갈라져 조정이 시끄러워졌고, 이이의 양파조정에도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다가 1591년 세자책봉문제로 집권한 동인도 서인들에 대한 논죄문제로 남북으로 다시 분열되어 정계는 당쟁에 휘말려 국력은 더욱 쇠약해졌다.



4. 임진왜란 발발


1583년과 1587년 2회에 걸쳐서 이탕개(尼蕩介)가 주동이 된 야인(野人)들이 반란을 일으켜 경원부가 함락되고 부내(府內)의 모든 진보(鎭堡)가 그들의 손에 들어가자 온성부사 신립(申砬)과 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을 시켜 그들을 무너뜨리고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소굴을 소탕시켰다.


1590년 일본의 동태가 수상하여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金誠一)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그곳 동향을 살펴오게 하였으나, 다음해 돌아온 두 사람이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함으로써 국방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던 중,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진을 필두로 각 고을이 무너지고 왜군이 침략한 지 보름 만에 서울도 위급하게 되자 수성(守城)의 계획을 포기하고 개성으로 물러갔다가 적이 한강을 건너 도성이 무너지자 다시 평양으로 퇴각했으며, 임진강의 방어선도 무너지자 의주로 피난하여 고급사(告急使)를 명나라에 보내어 원병을 청하고, 세자 광해군(光海君)으로 하여금 분조(分朝)를 설치하게 하여 의병과 군량을 확보하는 데 열중하도록 하였다.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적의 후방을 위협하였고 무기력하였던 관군도 전력을 가다듬어 각처에서 승첩(勝捷)을 거두고, 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 등 우리 수군이 제해권(制海權)을 완전 장악하였고, 명나라 원군이 와서 우리 관군과 함께 빼앗겼던 평양성을 수복하였으며, 권율(權慄)의 행주대첩으로 적의 사기가 꺾여 1593년 4월에 강화를 조건으로 서울에서 철수하여 남으로 퇴각하자 이해 10월 왕이 환도하였다.



5. 전쟁과정


다음해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사훈련을 강화시키고 투항해온 왜군으로 하여금 조총(鳥銃)쏘는 방법과 탄환 만드는 기술을 관군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왜군을 격퇴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군공사목(軍功事目)을 규정하여 군공을 세운 자는 신분에 따라 응분의 논공(論功)을 시행하는 등 비상책을 강구하였는데, 전쟁이 장기화되고 명나라 원군이 오랜 기간 머물게 되어 군량미조달이 심각한 국면에 이르게 되자 납속(納粟)을 한 자에게도 납속사목(納粟事目)에 규정한 논공을 설시하도록 하였다.


군공을 세운 자나 납속을 한 자는 논공을 할 때 주로 공명첩(空名帖)이나 실직(實職)을 주었으므로 하층 신분을 가진 자가 양반으로 격상되는 일이 허다하여 조선 후기 신분변화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임진왜란중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심지어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 일까지 있어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에 이르게 되자 매일 왕에게 공급되는 쌀의 양을 줄여서 굶주리는 사람을 진휼하는 데 보태도록 하였으며, 곳곳에 산재한 유해(遺骸)를 수집해서 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리게끔 하였다.



6. 정유재란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깨어지고 재차 왜군이 침입하자(丁酉再亂), 또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한편 관군의 정비를 촉구하였다. 왜란중에 3궁(三宮)이 소진되고 귀중한 전적(典籍)을 보관한 춘추관(春秋館)이 불타서 귀중도서가 소실된 것을 애석해 하며 각처에 흩어져 있는 서적들을 거두어 모아 운각(芸閣)에 보관하도록 하였으며, 불타서 없어진 문묘(文廟)에 설단(設壇)하고 제사를 드려 전쟁중에도 윤기(倫紀)의 소중함을 대내외에 알렸다.


궁궐이 불타서 왕이 정릉동(貞陵洞) 행궁(行宮)에 거처를 정하고 있을 때 실의에 잠긴 선조는 불에 탄 옛 궁궐터에 초가를 얽어 옮기려고 하였으며, 명나라 장수가 왕의 거처가 초라함을 보고 궁궐의 영건(營建)을 권하였으나 왜군의 깊은 원수를 갚기 전에는 지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정유재란 때 우리 수군함대가 부산에 총집결하자 이를 염려하고 병(兵)은 뜻하지 않은 곳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니 부산에만 강한 군사를 집결시킬 것이 아니라 호남지역도 소홀해서는 안되며 육지에도 험한 곳에 군대를 배치하는 것이 계책임을 역설하였다는데 그 추측은 들어맞았다.



7. 인품


두 대비 모시기를 친어머니 섬기듯 효도가 지극하였고, 성품이 본디 검소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성색(聲色)이나 오락에 괘념하지 않았고, 음식과 의복도 절제하여 비빈이나 궁인들이 감히 사치하지 못하였다. 항상 절용(節用)하고 농민들의 노고를 생각하여 한톨의 낟알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왜란이 끝난 뒤 1604년에 호성(扈聖)·선무(宣武)·청난(淸難) 등의 공신을 녹훈하여 전쟁의 마무리를 짓고 전후복구사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흉년이 거듭되고 동인·서인의 당쟁은 더욱 격심해져서 커다란 시련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왕이 죽기 직전에 측근을 불러 적자 영창대군을 보필해달라는 유언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바로 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창대군의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가 되었다.


서화에 뛰어났는데,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이 그것을 알고 선조의 어필(御筆)을 받기를 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능은 목릉(穆陵), 전(殿)은 영모전(永慕殿), 시호는 소경(昭敬)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Posted by 美

명 종
(明宗)

1534(중종 29)∼1567(명종 22).
조선 제13대왕.
재위 1545∼1567.
이름은 환,
자는 대양(對陽).



는 인순왕후(仁順王后)로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이다. 중종의 둘째아들이며 인종의 아우이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윤씨에서 인종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윤씨에서 명종을 낳았는데,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당시에 12세였던 명종이 즉위하였다.


린 나이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니,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이 득세하여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문정왕후가 명종을 낳자, 장경왕후의 동생인 윤임(尹任)은 김안로(金安老) 등과 함께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겼다.


1537년
(중종 32) 김안로가 실각하고 윤원형 등이 등용되자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암투가 더욱 치열해졌으니,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윤원형 일파를 소윤(小尹)이라고 하였다.


종이 즉위하자 한때 윤임이 득세하여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士林)의 명사를 많이 등용하여 기세를 떨쳤으나, 곧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크게 변하였다.


원형은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중종의 여덟째아들)에게 왕위를 옮기려 한다고 무고하는 한편, 윤임이 인종이 죽을 당시에 계성군(桂成君:성종의 셋째아들)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여, 이를 구실삼아 왕과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청하여, 윤임·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당류(黨流)인 사림을 유배시켰다.


어서 1547년에는 또다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계기로 그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로써 외척 전횡의 시대가 전개되자, 명종은 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이량(李梁)을 등용하였으나 그 역시 작당하여 정치가 더욱 문란해지고 파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러한 때를 틈타 양주의 백정(白丁) 임꺽정(林巨正)이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황해도와 경기도일대를 횡행하였고, 밖으로는 삼포왜란(三浦倭亂) 이래 세견선(歲遣船)의 감소로 곤란을 받아온 왜인들이 1555년 배 60여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해왔다.


들은 결국 이준경(李浚慶)·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 등에 의하여 영암(靈巖)에서 격퇴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비변사의 설치연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1510년(중종 5) 삼포왜란 때 일단 설치되어 임시기구로서 존속되어오다가 1555년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기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종 때는 문정왕후가 불교를 독실히 믿었기 때문에 불교의 교세가 일어났다. 문정왕후는 보우(普雨)를 신임하여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삼고, 1550년에 선·교(禪敎) 양종(兩宗)을 부활시키고 이듬해에는 승과(僧科)를 설치하였다.


우는 뒤에 도대선사(都大禪師)가 되었지만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잇따른 배불상소(排佛上疏)와 유림들의 기세에 밀려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변협(邊協)에게 피살되었다.


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관직을 삭탈당하고 강음(江陰)에 안치되어 죽었다. 이에 즈음하여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1563년에 13세로 죽고, 왕위는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중종의 아홉째아들)의 셋째아들이 계승하였으니, 이가 곧 선조이다. 능은 강릉(康陵)이며, 시호는 공헌(恭憲)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Posted by 美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614)
Sinology (19)
창조과학 (13)
맛 만들기 (45)
홍콩스토리 (44)
others (29)
한국역사 (410)
It's美 (18)
땅밟기 (6)
한마디 (7)
SEANOL (23)

달력

«   2008/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Statistics Gr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