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창령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위 작품은 총애를 잃은 궁녀의 고통과, 그들에 대한 동정을 표현하고, 나아가 여인에 탐닉하여 국사를 그르치는 황제를 풍자하고 계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하겠다.

시의 첫 두 구절에서는 매일 아침 비를 들고 청소 등 판에 박힌 일을 해야 하는 궁녀의 무료함과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해 갈피잡지 못하는 궁녀의 심사를 서술하고 있다.  이어 뒤 두 구절에서는 반첩여의 고사를 인용하여 이 궁녀의 서러움을 표현하고 있다.
위에서 소양(昭陽)은 한나라 때의 궁전인 소양전으로 한(漢) 나라 황제인 성제(成帝)와 조비연(趙飛燕) 자매가 기거했던 곳이다.  고대에는 태양으로 황제를 비유했기에 위 시구 중 일영(日影)은 황제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까마귀는 오히려 소양전 위를 날며 소양전의 햇빛을 받을 수 있지만, 자신은 장신궁(長信宮) 깊은 곳에 기거하기 때문에 황제를 한번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옥 같은 얼굴이 새까만 까마귀만도 못함을 한탄하고 있다.    

반첩여라는 여인은 누구인가? 반첩여는 한나라의 성제가 막 즉위할 때 후궁으로 뽑혀 들어온다.  처음에는 소사(少使)라는 관직에 임명되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황제의 큰 총애를 받아 첩여가 되어 황제의 아들을 낳았으나, 수개월  만에 그 아들을 잃고 만다.  그녀와 성제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가 얼마나 현명하고 법도를 잘 지키는 여인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어느 날 성제가 궁궐의 후정에서 유람할 때, 황제는 첩여에게 수레를 같이 타고 갈 것을 권유하지만, 첩여는 사양하며 "옛 그림을 보면, 어진 군주들은 모두 유명한 신하들을 곁에 두었으나, 하·은·주의 마지막 왕들은 곁에 사랑하는 여자들을 두었습니다.  지금 수레를 같이 타고자 하신다면, 그들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는 말로 황제의 권유를 사양하였다. 황제는 그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는 더 이상 권유를 할 수 없었다. 태후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옛날 번희(樊姬)가 있었다면, 지금은 반첩여가 있구나."라는 말로 첩여의 행동을 칭송해마지 않았다.  번희란 여인은 춘추시대 초(楚)나라 장왕(莊王)의 비로 장왕이 사냥에 탐닉하였을 때 번희가 수차례 그만 둘 것을 간하였으나 장왕이 말을 듣지 않자, 그녀는 그 이후로 짐승의 고기를 일절 입에 대지 않아, 왕이 잘못을 고치고 정사에 힘쓰도록 유도했던 여인이다.  

첩여는 이후에도 성왕들의 예법을 준칙으로 삼아 조심스럽게 행동함으로써 안에서 황제를보필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황제는 점점 여자에 탐닉하였다.  얼마 후 미천한 출신인 조비연 자매가 국가의 예의 법도를 무시하고 점점 황제의 사랑을 차지하게 된다.  이에 반첩여와 당시의 황후 허황후는 모두 총애를 잃고 황제를 만날 기회조차 없게 되고, 급기야 조비연은 허황후와 반첩여가 주술로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고, 후궁들을 저주하고, 황제까지 비방한다고 참소하였다.  허황후는 이 때문에 폐위되었고 이어 황제는 이 사실을 반첩여에게 추궁하자, 첩여가 대답하기를, "소첩이 듣기에 삶과 죽음은 명에 달려 있고, 부와 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저는 몸을 닦고 마음을 바르게 했어도 여전히 복을 받지 못했는데, 사악한 욕심을 부려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만약 귀신이 안다면 신하의 도리가 아닌 저주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만약 귀신이 모른다면 저주한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저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황제는 그녀의 대답에 수긍을 하고 그녀의 행실을 칭송하였지만, 첩여는 조씨 자매의 교만과 투기 때문에 위기가 곧 자기에게 닥칠 것을 예상하고는 장신궁에서 황태후를 모실 것을 자원하였고, 황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 후 첩여는 장신궁으로 물러나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眞成薄命久尋思  참으로 박명한 신세되어 오랜 그리움에 헤매이다
夢見君王覺後疑  꿈속에서 임금님을 뵈옵곤 깨고 나니 의심스럽네
火照西宮知夜飮  불빛은 서궁을 비추니 저녁 향연 있음을 알겠건만
分明複道奉恩時  성은(聖恩)을 받들던 때의 통로만이 훤히 빛나네

 
위 시를 지은 왕창령 (698~756)은 서안 사람이다. 그는 용표(龍標 : 지금의 湖南省 黔陽縣)로 귀양간 적이 있어 왕용표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용표에 가면 그의 자취를 많이 볼 수 있다.
그의 시는 구성이 긴밀하고 구상이 청신하였으며, 특히 7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아 '칠절성수 (七絶聖手)'라 칭해지기도 한다.  위의 시 역시 7언절구의 형식을 하고 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Posted by 美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614)
Sinology (19)
창조과학 (13)
맛 만들기 (45)
홍콩스토리 (44)
others (29)
한국역사 (410)
It's美 (18)
땅밟기 (6)
한마디 (7)
SEANOL (23)

달력

«   2008/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Statistics Gr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