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절강성 항주에서 남쪽으로 90여 킬로미터 떨어진 절강성 주지라는 곳이있다. 그곳은 중국 역사상 유명한 미인인 서시(西施)의 고향이다. 그곳은 서시고리(西施故里)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유적지가 복원되어 많은 관광객들로 늘 붐빈다.
香徑長洲盡棘叢 향경과 장주에는 온통 가시덤불
奢雲艶雨只悲風 사치와 호색의 오왕은 간 데 없고 슬픈 바람 뿐
吳王事事堪亡國 나라를 망친 것은 모두 오왕 때문이지
未必西施勝六宮 서시가 다른 비보다 예뻐서가 아니라네
위 시는 춘추전국 시대의 오(吳)나라 멸망의 원인이 서시(西施)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개인적인 사치와 호색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위에서 오궁(吳宮)은 오왕 부차가 서시를 위해 지어준 궁궐이며, 향경(香徑)은 오왕 부차가 서시를 위해 건설한 수로로, 서시는 이 수로에 배를 띄우고 꽃을 땄다. 장주(長洲)는 장주원 (長洲苑)으로 오왕 부차의 사냥터를 말한다. 그 화려했던 날들을 호령했던 오왕도 보이지 않고, 당시의 호화스런 수로와 장주는 이미 폐허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육궁(六宮)은 황후와 비가 거주하던 곳으로 여기에서는 그곳에 거처하던 후와 비를 일컫는다. 이 구절에서는 서시에게 오왕이 멸망한 죄를 물을 수 없음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

서시는 옛 월(越)나라의 여인으로 남의 빨래를 해주며 생계를 이어가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왕소군(王昭君), 초선 (貂蟬), 양귀비(楊貴妃)와 더불어 중국의 4대 미녀에 속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그 중 서시를 으뜸으로 쳐서 미의 화신으로 간주하고 있다. 서시를 이야기하자면 늘 침어(沈魚)라는 고사가 생각나는데, 이는 서시가 강가에서 빨래할 때 맑은 강물 위에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가 비치자 물고기조차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이 나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버려 강바닥에 가라앉고 말았다는 데에서 유래된다.
당시 서시의 월나라는 오나라에게 대패하여 월왕 구천(句踐)과 그의 신하 범려(范 )는 인질로 오나라에 잡혀가게 되었다. 구천은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부차에게 짐짓 매우 충성스런 태도를 고수하였다. 부차가 병이 났을 때 어떠한 약을 써도 듣지 않자, 부차의 대변을 직접 맛보고 처방을 내려주면서까지 자신에게는 추호도 원망함과 복수할 마음이 없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에 안심한 부차는 구천과 범려를 다시 월나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오나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며, 안으로 부국강병에 힘쓰는 한편 미인계를 써서 오왕 부차를 무너뜨리고자 미인 서시를 부차에게 바쳤던 것이다. 아름다운 서시가 오나라로 들어오자 예상했던대로 오왕 부차는 서시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음락에만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월왕 구천은 군사를 출동시켜 오나라를 함락시키고 복수를 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이 물고기도 넋을 빼고 바라보던 아름다운 서시를 항주 서호에 비유하여 서호의 명성을 더욱 드높인 문인이 있었는데, 그는 다름아닌 송대의 소동파(蘇東坡)이다. 그가 서호에 대해 읊은 시는 서호를 노래한 수많은 문인들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절창으로 손꼽히고 있다. 비 갠 후에 서호 가에서 술을 마시는 정취를 읊은 그의 시를 또한 여기에 소개한다.

水光晴方好 호숫물 반짝거려 맑은 날 좋더니,
山色空蒙雨亦奇 산 어둑 어둑 비 내려도 기이하네.
欲把西湖比西子 서호를 서시에 비유하니,
淡粧濃抹總相宜 옅은 화장 짙은 화장 모두 제격이네.
소동파의 위 시는 서호가 어떠한 날씨이든 나름대로의 운치를 지니고 있음을 서시의 자태를 빌어 이야기하고 있다.
위 시의 작자인 육구몽은 만당(晩唐)의 시인으로 자는 노망(魯望)이고 號는 강호산인(江湖山人), 천수자(天隨子), 보리선생(甫里先生)등으로 불렸다. 소주(蘇州)의 명문 출신으로 어렸을 때 이미 육경 (六經)에 능통하였으며, 특히『춘추(春秋)』에 조예가 깊었다. 함통(咸通) 연간에 진사시험에 낙방한 후 다시 응시하지 않고 송강(松江)의 보리(甫里) 에 은거하여 농경 생활에 힘쓰는 한편 시를 즐기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香徑長洲盡棘叢 향경과 장주에는 온통 가시덤불
奢雲艶雨只悲風 사치와 호색의 오왕은 간 데 없고 슬픈 바람 뿐
吳王事事堪亡國 나라를 망친 것은 모두 오왕 때문이지
未必西施勝六宮 서시가 다른 비보다 예뻐서가 아니라네
위 시는 춘추전국 시대의 오(吳)나라 멸망의 원인이 서시(西施)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개인적인 사치와 호색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위에서 오궁(吳宮)은 오왕 부차가 서시를 위해 지어준 궁궐이며, 향경(香徑)은 오왕 부차가 서시를 위해 건설한 수로로, 서시는 이 수로에 배를 띄우고 꽃을 땄다. 장주(長洲)는 장주원 (長洲苑)으로 오왕 부차의 사냥터를 말한다. 그 화려했던 날들을 호령했던 오왕도 보이지 않고, 당시의 호화스런 수로와 장주는 이미 폐허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육궁(六宮)은 황후와 비가 거주하던 곳으로 여기에서는 그곳에 거처하던 후와 비를 일컫는다. 이 구절에서는 서시에게 오왕이 멸망한 죄를 물을 수 없음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

서시는 옛 월(越)나라의 여인으로 남의 빨래를 해주며 생계를 이어가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왕소군(王昭君), 초선 (貂蟬), 양귀비(楊貴妃)와 더불어 중국의 4대 미녀에 속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그 중 서시를 으뜸으로 쳐서 미의 화신으로 간주하고 있다. 서시를 이야기하자면 늘 침어(沈魚)라는 고사가 생각나는데, 이는 서시가 강가에서 빨래할 때 맑은 강물 위에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가 비치자 물고기조차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이 나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버려 강바닥에 가라앉고 말았다는 데에서 유래된다.
당시 서시의 월나라는 오나라에게 대패하여 월왕 구천(句踐)과 그의 신하 범려(范 )는 인질로 오나라에 잡혀가게 되었다. 구천은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부차에게 짐짓 매우 충성스런 태도를 고수하였다. 부차가 병이 났을 때 어떠한 약을 써도 듣지 않자, 부차의 대변을 직접 맛보고 처방을 내려주면서까지 자신에게는 추호도 원망함과 복수할 마음이 없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에 안심한 부차는 구천과 범려를 다시 월나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오나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며, 안으로 부국강병에 힘쓰는 한편 미인계를 써서 오왕 부차를 무너뜨리고자 미인 서시를 부차에게 바쳤던 것이다. 아름다운 서시가 오나라로 들어오자 예상했던대로 오왕 부차는 서시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음락에만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월왕 구천은 군사를 출동시켜 오나라를 함락시키고 복수를 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이 물고기도 넋을 빼고 바라보던 아름다운 서시를 항주 서호에 비유하여 서호의 명성을 더욱 드높인 문인이 있었는데, 그는 다름아닌 송대의 소동파(蘇東坡)이다. 그가 서호에 대해 읊은 시는 서호를 노래한 수많은 문인들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절창으로 손꼽히고 있다. 비 갠 후에 서호 가에서 술을 마시는 정취를 읊은 그의 시를 또한 여기에 소개한다.

水光晴方好 호숫물 반짝거려 맑은 날 좋더니,
山色空蒙雨亦奇 산 어둑 어둑 비 내려도 기이하네.
欲把西湖比西子 서호를 서시에 비유하니,
淡粧濃抹總相宜 옅은 화장 짙은 화장 모두 제격이네.
소동파의 위 시는 서호가 어떠한 날씨이든 나름대로의 운치를 지니고 있음을 서시의 자태를 빌어 이야기하고 있다.
위 시의 작자인 육구몽은 만당(晩唐)의 시인으로 자는 노망(魯望)이고 號는 강호산인(江湖山人), 천수자(天隨子), 보리선생(甫里先生)등으로 불렸다. 소주(蘇州)의 명문 출신으로 어렸을 때 이미 육경 (六經)에 능통하였으며, 특히『춘추(春秋)』에 조예가 깊었다. 함통(咸通) 연간에 진사시험에 낙방한 후 다시 응시하지 않고 송강(松江)의 보리(甫里) 에 은거하여 농경 생활에 힘쓰는 한편 시를 즐기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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