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왕후(文明王后)

 

 

간략정보 

시대           신라 

생몰년        미상 

시호           문명왕후 

활동분야     비 

다른 이름    문희(文姬) 

 

문명왕후(文明王后)에 대하여 


문명왕후(文明王后)


생몰년 미상.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비.
이름은 문희(文姬). 소판(蘇判:
) 서현(舒玄)의 계녀이며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이다.

《삼국유사》에는 훈제부인(訓帝夫人)으로 되어 있으며 문명왕후는 시호이다.


처음에 그녀의 언니 보희(寶姬)가 꿈에 서형산(西兄山:경주 서악)에 올라앉아 오줌을 누니 서울(慶州)안에 가득찼다. 꿈을 깨어 아우 문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였더니, 아우는 웃음의 말로 “내가 언니의 꿈을 사고 싶다.” 하고는 그 값으로 비단치마를 언니에게 주었다.


그뒤 열흘 만에 김유신이 김춘추(金春秋)와 함께 정월 오기일(午忌日)에 자기집 앞에서 공을 차다가 춘추의 옷끈을 밟아 떨어뜨렸다. 김유신이 내집이 가까우니 가서 옷끈을 달자 하고 함께 집에 가서 주연(酒宴)을 베풀고 조용히 보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꿰매라고 하였다.


보희가 사양하여 나오지 않고 문희가 나와서 옷끈을 달았는데, 그 수수한 몸치장과 가벼운 옷에 어여쁜 얼굴빛은 김춘추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충분하였다.


그뒤 김춘추가 자주 내왕하였는데, 김유신은 문희가 임신한 것을 알고 “부모에게 고하지도 않고 아이를 배었으니 이 무슨 까닭이냐?”고 꾸짖고 국중(國中)에 누이를 태워죽인다는 말을 퍼뜨렸다.


하루는 선덕여왕이 남산(南山)에 놀러가는 것을 기다려 나무를 마당 가운데 쌓고 불을 질러 연기를 내었다. 왕이 연기를 보고 물으니, 좌우에서 김유신이 누이를 태우려는 것 같다고 하였다. 왕이 연고를 물으니, 그의 누이가 남편 없이 임신한 까닭이라고 하였다.


왕이 김춘추의 소위인 것을 알고 속히 가서 구하라고 하였다. 김춘추가 명을 받고 말을 달려가서 죽이지 못하게 하는 뜻을 전하고 곧 혼례를 행하였다. 문희는 김춘추가 진덕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르자 그 비가 되었다.


소생으로는 문무왕인 태자 법민(法敏), 각간(角干) 인문(仁問)·문왕(文王)·노차(老且)·지경(智鏡)·개원(愷元) 등이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金福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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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善德女王) 

 

 

간략정보 

 

시대           신라 

생몰년         ?-647(선덕여왕16) 

호               성조황고(聖祖皇姑) 

시호            선덕(善德) 

활동분야     왕 

다른 이름    김덕만(金德曼) 

 

 

 

 

 

?∼647(선덕여왕 16). 신라 제27대왕. 재위 632∼647.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의 장녀로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 선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고 하는 특수한 왕족의식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였으며, 633년(선덕여왕 2)에는 주군(州郡)의 조세를 일년간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634년에 분황사(芬皇寺)를,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634년에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고왕실의 자주성을 견지하려고 했다. 다만 즉위 이래 거의 매년 당나라에 대해 조공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당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격이 빈번해짐에 따라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국가를 보존하려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신라는 642년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이해에 신라는 백제의 의자왕의 침공을 받아 서쪽 변경에 있는 40여성을 공취당하였으며,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지금의 南陽)도 고구려·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또한 백제장군 윤충(允忠)의 침공으로 낙동강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지금의 陜川)이 함락당하였다.


이와같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선덕여왕은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지금의 慶山) 군주(軍主)에 임명하여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무렵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자장(慈藏)의 건의에 따라 호국불교의 상징인 황룡사9층탑(皇龍寺九層塔)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구원요청에 접한 당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양국의 침범을 받게 되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편 고구려에 대해서는 644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적 견제를 가하였으나 이는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그런데 당태종에 의해서 지적되었던 여왕통치의 문제점은 신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켜 647년 정월에는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것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었다. 여왕은 이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위 16년 만에 죽으니 시호(諡號)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上大等考(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新羅 奈勿王系의 血緣意識(李基東,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郎徒, 韓國硏究院, 1980)

新羅政治體制の變遷過程―門閥貴族の集團支配と專制王權―(井上秀雄, 古代史講座4, 東京學生社, 1962). 〈金瑛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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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에 대한 재평가


서병국(대진대학교 교수)


중국인의 관련 기록들이 말하고 있듯이 고구려의 멸망을 앞두고 나타난 온갖 말기적 병폐 요소를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일으킨 장본인으로 모든 책임이 한 몸에 모아지고 있는 인물이 연개소문이다. 연개소문의 인간성과 정치적 독재성에 관해 중국인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삼국사기》에 실린 그의 열전(권 19)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의 인간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부출신의 대인(대인)으로서 대대로라는 벼슬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 연태조(연태조)가 죽은 후 연개소문은 그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으나 잔인한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라 사람들은 처음에 이를 반대했다. 결국 반대자들의 양해하에 그는 대대로 벼슬을 차지하긴 했으나 대신들은 꺼려 영류왕과 모의하여 그를 제거하려 했다. 거사를 앞두고 기밀이 누설되자 연개소문은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군대사열식을 거행한다고 빙자하여 대신들의 참관을 청했다.


연개소문의 지휘를 받는 부병(부병)들은 계획한 대로 현장에 나온 100여명의 고급관리들을 모조리 죽이고는 즉시 궁중에 있던 영류왕을 시해하고 그 시신을 여러 토막으로 잘라 구렁창에 내버리고 나서 영류왕의 동생 보장을 새왕으로 세웠다. 쿠테타를 통해 연개소문은 스스로 막리지 자리에 올랐는데 이는 당나라의 병부상서와 중서령 벼슬을 겸임한 것 같았다. 전국의 모든 권력을 쥐어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하게 된 연개소문은 몸에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다보니 누구도 그를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말을 타거나 내릴 때는 땅에 엎드린 무장들의 등위를 밟고 오르내렸다. 또한 외출할 때면 반드시 의장대를 내보내고 길을 인도하는 사람은 고함을 크게 질러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피했다. 그러다보니 온나라 사람들의 괴로움이 매우 심했다는 것이다. 보았듯이 연개소문의 인간성을 보여주고 있는 이 기록 외에 다른 자료가 없다면 누구든지 위 기록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개소문의 인간성에 대해 여론을 조작한 당나라의 태종은 연개소문의 시해 사건과 이에 따른 국권 전횡을 트집잡아 고구려 침공을 계획했으나 장손무기(장손무기)의 신중론을 받아들여 일단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러나 태종의 생각은 갑자기 바뀌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는 틈을 타고 신라가 점령한 5백리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가 신라를 압박했는가 하면 신라 사신이 당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가로 막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외교적 몸짓으로 사신 상리현장(상리현장)을 고구려에 보내 이의 중지를 청했으나 연개소문은 완강히 거부했다. 이러한 보고를 받고 고구려를 침공하기로 결심한 태종은 다시 장엄(장엄)을 고구려에 보내 최후 통첩을 했으나 연개소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사신을 가두기까지 했던 것이다. 잃어버린 옛 땅을 다시 찾는 것은 고구려의 기본 생존권이 아닐 수 없다. 연개소문이 당나라 태종의 위협적인 압력을 완강히 거부했다는 데서 지금까지 내려진 그에 대한 평가와 달리 그는 고구려의 민족정신을 계승한 철저한 민족주의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 침공을 앞두고 태종은 의도적으로 연개소문을 시해 사건과 관련지어 여러 차례 비난했으나 침공을 반대한 신하가 한 두명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이처럼 태종이 연개소문을 비난한 것은 시해 사건일 뿐 다른 것은 없었다. 사실상 연개소문은 집권전부터 당나라와 마찰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도교의 도입을 영류왕에게 건의하여 왕의 이름으로 도사의 파견을 당나라에 청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도교의 창시자인 노자가 당나라 왕실의 조상이라는 데서 도교는 당나라 왕실로부터 극진한 보호를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당나라는 즉시 도사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도덕경(도덕경)의 강론이 영류왕 이하 대신들의 참석하에 매일 성황을 이루어 마침내 불교의 사찰이 도사들이 머무는 장소인 도관(도관)으로 바뀔 정도였다. 고구려에 처음 도교가 들어오는 길을 열어놓은 연개소문이 도교에 남다른 관심을 쏟은 것은 중국에서 유교·불교·도교가 나란히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고구려에서도 도교의 발전을 똑같이 이루어 보려는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연개소문이 당나라 왕실의 관심과 보호를 받고 있는 도교의 도입을 역설한 것은 당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려는 생각이 없었다는 데서 주목할 일이며 더 나아가서 고구려의 문화를 당나라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연개소문은 민족주의를 추구하긴 했으나 문화의 세계사적 흐름을 정확하게 알아차린 문화의 선각자였다 할 것이다. 지금까지 불교가 고구려 사람들의 정신과 사상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도교의 갑작스런 성행으로 불교가 큰 영향을 받아 세력이 전보다 줄었을 것은 명백하다. 650년(보장왕 9) 고구려 사람들이 도교에 큰 관심을 쏟고 있어 고구려에서 불교의 세력이 전만 같지 못하게 됨으로써 불교의 위기의식을 느낀 반룡사(반룡사)의 보덕화상(보덕화상)은 백제의 완산(완산) 고대산(고대산)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는 그만큼 불교의 세력이 도교에 의해 크게 잠식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적 망명을 한 보덕화상의 이후 활동은 불교세력을 만회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사상면에서 도교와 종교적 논쟁을 전개해 나갔다. 보덕은 세력을 펴 나가고 있는 도교의 기본사상인 불로장생설(불로장생설)을 누르기 위해 모든 중생은 불성(불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누구든지 수양만 올바르게 하면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내세우고 있는 열반종(열반종)을 열었는데 크게 유행하여 후일 신라 5교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듯 열반종이 고구려에서 만들어지지 못한 것은 고구려 사람들의 종교적 관심이 불교에서 도교로 완전히 기울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개소문이 천리장성의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도중에 국왕을 시해한 것은 고구려를 전쟁이라는 위기상황으로 몰고 있는 강경파의 대당나라 정책에 강한 불만을 가졌다는 데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연개소문의 시해 사건 전에 그의 제거가 영류왕 등 강경파에 의해 시도된 적이 있었으며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강경노선을 뒤집기 위해 영류왕 등 100여명의 강경파 인물들을 일시에 제거했다. 강경파의 숫자를 알 수 없으나 백여 명이 넘었던 것으로 보아 온건파에 속한 인물도 적지 않았을 것 같다. 연개소문은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은 다수의 온건파 중심으로 정부를 구성하여 실질적으로 고구려를 이끌어 나가는 제1인자가 되었다. 정변으로 중앙의 강경파가 모두 제거되었다 하겠으나 지방에는 강경파 인물이 여전히 남아 있어 온건파 중심으로 구성된 중앙정부에 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의 집권에 대해 가장 완강하게 저항한 지방의 강경파 인물은 주로 수나라와의 혈전시에 실전 경험이 많은 안시성 등 서부의 모든 성주들이었다. 지방의 강경파 인물들이 건재하고 있는 한 연개소문 정권은 오래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연개소문파는 정권 유지 차원에서 요동지방의 저항적인 성주들을 방치할 수 없는 일이다. 연개소문 중심의 온건파 정부는 반항하는 성주들의 저항을 분쇄하는 작전으로 나와 거의 이들 성주들을 굴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운명이 걸린 연개소문 정권의 분쇄작전에도 불구하고 끝내 굴복하지 않아 연개소문도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었던 것은 안시성을 지키는 성주 한 사람 뿐이었다. 연개소문의 온건 노선에 강한 불만을 갖고 서부의 모든 성주들이 반항한 사건은 고구려의 국내문제이지만 당나라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이러하다보니 강·온 양파의 대결 상황이 벌어지고 안시성주 한 사람만 끝내 연개소문에게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은 고구려의 내분사건인 만큼 태종도 그 전모를 알고 있었다.


안시성 성주는 굴복하지 않았으나 다른 성주들이 모두 굴복했다는 면에서 일단 연개소문은 지방의 반대파를 완전히 장악하여 비로소 고구려의 전 지역에 그의 통치권이 미치게 되었다. 완전히 온건파로서 구성된 고구려 정권은 당나라에 대해 부드러운 태도를 나타내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태종은 고구려의 온건노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연개소문이 주도한 시해 사건을 의도적으로 확대시켜 이를 고구려 침공의 다시없는 명분으로 고리를 엮어 자신의 구상대로 고구려를 침공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태종은 고구려의 당나라에 대한 온건노선보다 시해 사건에만 비상한 관심을 두었다 하겠다. 그런데 온건노선을 전개하려면 연개소문으로서는 강경파의 중심인물인 영류왕 시해 사건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해 사건을 일으킨 연개소문은 중국의 전통적인 윤리관념에 따라 잔인한 성격의 강경한 인물로 관련된 모든 기록에 묘사되고 있는데 그렇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강경책보다 온건노선이 당나라의 침공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면 일단 추구해 볼만도 하다. 그러나 강경파로서는 온건노선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 아니라고 확신하여 먼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고구려에 온건노선을 추구하는 정권이 나왔는데도 태종은 고구려라는 반당적인 대제국 자체를 역사에서 소멸시키려 하니 태종의 배신행동에 대한 연개소문의 실망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이다. 도교의 도입을 그처럼 역설한 연개소문이 도교의 강론까지 폐지했다는 일설도 있는데 이는 당나라에 대한 배신감에서 나온 듯하다. 연개소문이 도교의 도입을 주장한 것은 당나라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분명히 보여주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자신을 끝내 악인으로 몰고가는 태종의 악의적인 적대행동을 확인하고 나서 연개소문의 온건노선이 강경책으로 바뀐 것은 태종에 대한 실망에서 나타난 반사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또한 연개소문을 더욱 악인으로 조작하려는 태종에게 빌미를 준 셈이되어 연개소문은 가일층 잔인하고 난폭한 성격의 인물로 낙인이 찍혀지고 국왕을 죽인 죄인의 모습만 확대되어 중국인의 모든 기록에 실려지게 되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당나라 태종의 악의에 찬 배신행동에 분격한 연개소문은 드디어 강경파로 변신함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강경분자로서 그 이름을 떨친 안시성주 양만춘(양만춘)과의 불편했던 관계도 화해되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침공군의 필사적인 포위 공격가운데서도 안시성은 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연개소문의 적극적인 군사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원래 온건노선을 주장했던 연개소문이 강경노선으로 급선회하여 양만춘의 강경노선을 따르는 등 두 사람이 당나라에 대한 노선문제에서 완전히 일치하여 화합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연개소문과 양만춘의 관계가 호전되었다 해서 요동지방의 전열이 전처럼 가다듬어진 듯하지 않다. 연개소문의 집권에 저항했던 성주들이 굴복함으로써 연개소문파의 인물이 성주자리를 차지했을 것은 분명하다. 다시말해 당나라의 침공을 앞두고서 영류왕파의 성주들이 연개소문 추종자들로 교체됨으로써 고구려의 군사 전략상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을 것 같아 전력의 약화가 빚어졌을 가망이 크다는 것이다. 요동을 침공했다가 여지없이 참패한 태종의 원수를 갚기위해 고종이 보복전을 전개할 때 요동지방의 큰 성 몇 개가 무너지자 연쇄적으로 주변의 성들이 싸움다운 싸움도 하지않고 항복한 것은 성주의 교체에 따른 전력약화와 상당한 연관이 있는 듯하다.


연개소문의 가계가 고구려의 동부출신으로 밝혀진 만큼 옛 성주들이 물러난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역시 동부출신의 사람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파를 달리하는 성주의 교체가 이루어짐으로써 신·구 성주들간에도 대립·반목같은 현상이 일어났을 것은 분명하다.


수나라와 싸웠던 경험이 많은 서부출신의 성주들이 물러나고 별로 실전경험이 없는 동부출신의 사람들이 연개소문 추종자로 서부지방의 성주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빚어진 현상은 고구려 동서간의 일대 분열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분열이 몰고 온 피할 수 없는 결과는 운명을 걸고 전쟁터에 나온 당나라군의 침공이긴 하지만 고구려군이 전처럼 완강한 저항도 제대로 하지못함으로써 평양성이 함락되어 최후를 맞는 비운을 보게된 것이라 하겠다.


연개소문이 주도한 온건노선을 당나라가 받아들였다면 고구려의 운명은 이처럼 빨리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연개소문의 온건노선은 결국 나라를 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연개소문이 처음부터 온건노선을 들고나온 것은 그가 동부출신으로서 수·당나라의 패권주의에 밝지못한 데서 그 단서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동부사람들은 거리상 중국실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서부사람들은 중국과 전쟁을 거의 해마다 치루다보니 누구보다 중국실정에 밝아 끝까지 싸우는 것 외에 고구려의 살 길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한편 동부사람들은 수나라와 치룬 싸움에서 이긴 고구려에도 엄청난 손실이 있었음을 의식하여 사전에 당나라의 침공을 막으려하여 온건노선을 구국의 이념으로 들고 나온 듯하다. 연개소문의 가계 뿐 아니라 동부사람들은 될 수 있는 한 전쟁을 피하려하여 미리 전쟁을 막는데 온힘을 쏟은 듯하다. 시해사건이 일어나기 1년전에 고구려의 지리 등 기밀 전반에 걸쳐 고도의 정보수집을 주된 임무로 부여받고 고구려에 합법적으로 들어온 당나라의 사신 진대덕(진대덕)을 영접한 대대로 연태조(연개소문의 아버지)가 진대덕으로부터 서역의 고창국(고창국)이 당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말을 전해듣고 진대덕이 머물고 있는 객관(객관)으로 세 차례나 찾아와 예를 베푼 사실도 있었다. 그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연태조가 세 차례나 찾아온 것은 당나라에 대해 겁을 먹었기 때문인 듯하다. 연태조의 이러한 점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나라에 정치적 망명을 한 연남생(연개소문의 맏아들)이 온순, 후덕하며 예의있는 성품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할아버지의 온건한 성품과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대해 나타낸 온건노선도 그의 온순한 성품에서 빚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연개소문의 아버지와 아들의 온순한 성품으로 보면 연개소문의 성품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중국인의 모든 관련기록은 연개소문을 악인으로 낙인을 찍고 있다. 당나라가 연개소문을 다루기 힘든 사람이라고 여겼다면 중국인의 기록에 악인으로 둔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연개소문이 다루기 힘든 거북스런 인물이다 보니 당나라는 고의적으로 그를 악인으로 꾸몄던 것이다. 이 같은 중국인의 기록이 가장 오래되다 보니《삼국사기》역시 연개소문을 악인으로 단정을 짓기에 이르렀다고 풀이할 수 있다.


연개소문의 명예를 깎아내리려는 저의를 반영하고 있는 중국인의 기록을 맹종하다 보면 연개소문이 태종의 침공을 받은 후에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더욱 포악한 행동을 자제하지 않았다는 따위의 표현밖에 나올 수 없을 것이다. 태종의 쉴새없는 침략적 도발로 고구려가 인명과 물질면에서 큰 손실을 입어 국력의 소모가 컸던 것은 인정할 수 있으며 해마다 침공한 것은 고구려의 국력을 최대한 소모시키는데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쉴 사이를 주지않고 계속 퍼분 공격으로 연개소문 집권시에 있었던 최악의 위기는 661년 설필하력이 이끄는 당나라군이 연남생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의 방위망을 돌파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쪽으로 수십리 내려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당나라군은 이듬해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연개소문은 방효태가 거느린 당나라군을 청천강에서 섬멸하여 스스로 물러나게 했다. 결국 연개소문의 생존시 고구려는 최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666년 연개소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비상시국을 맡게 된 인물은 그의 맏아들 연남생이었다. 아버지의 대권을 계승한 그는 막리지로서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직접 여러 성을 돌아다니면서 살피는 등 동분서주했던 시기에 아들 삼형제 간에 대권을 둘러싸고 싸움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 멸망의 모든 책임을 연개소문의 독재정치와 아들간의 내분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그들의 기록은 이 부분을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고구려의 멸망은 연개소문이 막리지가 됨으로써 나타난 포악한 정치가 빚어낸 결과라고 마무리짓고 있으나 멸망원인은 중국인이 강조하고 있듯이 연개소문과 그 집안사람들의 국정 운영이 잘못되었다는 데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다각적인 측면에서 살피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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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淵蓋蘇文)



■ ?∼665(보장왕 24)
■ 고구려 말기의 재상 및 장군
■ 본관은 고령(高靈)
■ 개금(蓋金,盖金),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


연(淵)씨의 유래


할아버지는 자유(子遊)이고, 아버지는 태조(太祚)로 이들은 모두 막리지(莫離支)의 지위에 올랐다고 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성씨에 대하여 중국측 기록에는 ‘천(泉)’ 또는 ‘전(錢)’이라 하였는데, 이는 연(淵)이 당나라 고조(高祖)의 이름인 이연(李淵)과 같으므로 그것을 피하려고 한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그의 성을 천(泉)이라고 한 것은 연개소문에 관한 기사의 전부가 당나라의 서적에 의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시조는 ‘샘〔井〕’ 또는 ‘물〔水〕’에서 태어 났다고 한다.

연(淵)이라는 성도 거기에서 유래하였던 것 같다. 샘이나 ‘내〔川〕’ 또는 ‘호수’의 정령(精靈)을 외경하여, 이를 자신들의 시조와 연계시키고 있음은 고대 동북아시아 제민족의 설화와 신화에 널리 보이는 사실이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그의 이름을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로 기록하고 있다.



집권과정


그는 성품이 호방하고 의표가 웅위하였다고 한다. 동부(또는 서부라고도 함.) 대인(大人)이었던 아버지가 죽은 뒤, 연개소문이 그 직을 계승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력 귀족들이 그의 세력과 무단적인 기질을 두려워하여 이를 반대하자, 그의 계승을 반대하는 귀족들에게 호소하여 간신히 승인을 받았다.

뒤에 천리장성을 쌓는 최고 감독자가 되었는데, 그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두려워한 여러 대신들과 영류왕이 그의 제거를 모의하였다.

이를 눈치 챈 그는 642년(영류왕 25) 평양성 남쪽 성 밖에서 부병(部兵)의 열병식을 구실로 귀족들을 초치한 뒤, 정변을 일으켜 이들을 모두 죽이고 왕궁에 돌입하여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웠다. 그리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대권을 장악한 뒤,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제거를 감행하였다.

당시 안시성(安市城)의 성주는 그의 반대파였으므로 이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의 공방전은 승패가 나지 않아 양자간에 타협으로 일단락 되었다.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주의 지위를 계속 인정하였고, 그 대신 안시성주는 새로운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승복하였던 것 같다.

이 안시성주와의 협상이 보여주듯이, 연개소문의 집권은 고구려 하대의 귀족연립정권체제를 근본적으로 타파하였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하대에는 실권자의 직위인 대대로(大對盧)를 5부(部) 귀족들이 호선하였다. 3년에 한번씩 선임하였는데 연임도 가능하였다. 그런데 대대로 선임 때에 귀족간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여의치 않으면 각기 사병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결정지었다.

이때 왕은 이를 통제할 힘을 가지지 못하여 방임하는 형편이었다. 중앙에서의 그러한 정변은 때로는 지방에까지 확산되어 갔다.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 보이는 유혈사태와 잇따른 안시성주와의 분쟁 등은 그러한 한 단면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속적 집권과 그 지위가 아들에게로 세습됨에서 보듯, 연씨 일가를 중심으로 한 보다 강력한 집권화가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집권 후 국내 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숙달(叔達) 등 8명의 도사를 맞아들이고 도교(道敎)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대외관계

연개소문이 집권할 무렵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긴박한 정세에 처하고 있었다. 수나라와의 20여년에 걸친 전쟁이 수나라의 멸망으로 종결된 뒤, 한때나마 중국세력과의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다.

622년(영류왕 5)에는 수나라와의 전쟁기에 있었던 양측의 포로와 유민의 상호교환협정이 체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말기의 혼란과 분열을 통일하고 당나라의 세력이 강화되어감에 따라, 양국관계는 긴박해져 갔다.

서쪽으로 고창국(高昌國)을 멸하고, 북으로 돌궐(突厥)을 격파 복속시킨 뒤, 명실공히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당의 팽창책은 자연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그 압력을 가중시켜왔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여, 한편으로는 부여성에서 발해만 입구에 이르는 그 서부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았다.

한편,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간의 충돌이 빈번하였고,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음에 따라 한강유역을 둘러싼 6세기 후반 이래의 삼국간의 분쟁이 더 격화되어갔다.



대외정책

이러한 국제적인 긴박한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강경일변도의 대외정책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격렬한 정변을 통하여 집권한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처지와도 상관되는 것이다. 대외적인 위기의식과 전쟁은 강력한 집권화를 도모하는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자세와 밀접히 결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찾아와서 제안한 양국의 화평을 거부하였고,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라고 하는 압력을 거부하고 당의 사신을 가두어 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당에 대하여 단호한 대결자세를 굳힘으로써 항쟁의식을 확고히 하고 말갈족과 같은 예하의 복속민들의 이탈을 방지하며 전쟁에 대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는 처지의 표명이었다.

그러한 면은 644년 당태종의 침공 이후 계속된 당과 신라군의 침공에 대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서 구현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당과의 사이는 전시대의 수와의 사이에서와 같이 전쟁이 불가피하였다.

즉, 5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다원적인 세력균형상태가 중국대륙에 강력한 통일제국이 출현됨에 따라 깨어져갔다.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세계질서를 구축하려 함에서 수·당제국과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사이에는 전쟁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다만 당나라 초기의 중국 내부의 사정과 그리고 이어 돌궐과의 관계로 인하여, 고구려와 잠정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의 당나라에 대한 강경정책은 영양왕이 요서(遼西)지방을 선제공격하여 수나라와의 전단을 열었던 것과 같은 배경에서이다.

그리고 수양제의 침공에 대비하여 고구려가 돌궐과의 연결을 도모하였듯이, 그는 당태종이 침공해오자 당시 몽고고원에서 돌궐에 대신하여 흥성하였던 설연타(薛延陀)의 세력과 연결하여 당의 후방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러한 것은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 위에서 나온 것이다.



경직된 정책술

그러나 이를 수행함에서 탄력성을 결여한 경직된 면을 보였다. 당과의 대결을 앞두고 신라와의 관계를 악화시킴으로써 남북으로부터의 협공 가능성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고, 그것은 고구려에 치명적인 요인이 되었다.

나아가 당과의 전쟁에 있어서도 경험이 풍부한 노장(老將)들의 주장과는 달리 전통적인 성곽 중심의 방어전을 버리고 평원에서의 대회전(大會戰)을 기도함에 따라 대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는 상대와 자신의 실력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그에 따른 대책이 수반되지 못한 경직된 면모를 보여 준 것이다.

구체적으로 안시성 부근 평원에서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이 이끈 고구려 중앙군이 안시성의 세력과 연결하며 장기적 저항책을 구축하지 않고, 당군과의 정면 회전을 기도하였던 것은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서 파생하였던 문제와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젊은 장수를 기용하여 한꺼번에 당군을 격파함으로써 새로운 집권세력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개재되어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하겠다.


고구려의 멸망

어쨌든 고구려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 발발하여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강경한 지도노선은 안팎으로 강력한 통수력과 저항력의 구심점으로 힘을 발휘하였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군의 계속된 침공과 신라군의 협공의 위기 속에서 이제 주된 방어선이 수도인 평양성으로까지 밀린 상황에서도 그는 고구려국의 최고집권자로서 저항을 주도하였다.

그러다가 665년 그가 죽자, 그의 맏아들 남생(男生)이 그의 직을 계승하였고 남건(男建)·남산(男産) 등이 권력을 나누어 맡았다. 곧이어 형제간의 분쟁으로 남생이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신라로 투항하는 등 내분이 일어남으로써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고구려는 멸망으로 치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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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美

영류왕
(榮留王)


?∼642(보장왕1)
고구려 제27대왕
재위 618∼642


   이름은 건무(建武) 또는 성(成)이라 하였으며, 영양왕의 이복동생으로 영양왕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의 개인적 성품이나 행적 등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으며, 단지 《삼국사기》를 통하여 그의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자취만을 엿볼 수 있다.


   왕의 즉위년(618)에 중국에서는 수(隋)나라를 이어 당(唐)나라가 건국되었다. 고구려로서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함과 아울러, 새로 등장하는 당나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당나라도 국내의 완전한 통일작업과 민심의 수습, 그리고 돌궐의 위협에서 벗어나기까지는 고구려와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여야 하였다.


   이에 양국은 외교사절을 자주 교환하고,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시 사로잡힌 포로들을 622년(영류왕 5)에 교환하는 등 현실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이러한 우호적 관계 속에서 624년 당나라로부터 공식적 외교관계를 통하여 도교(道敎)가 들어왔고, 다음해에는 사람을 당나라에 보내어 불교와 도교를 배워오게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가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아가서 630년 동돌궐을 격파하고, 640년 고창국(高昌國)을 복속시키면서 양국간에는 점차 긴장이 고조되어갔다. 640년에는 태자인 환권(桓權)을 당나라에 파견하고, 당나라의 국학(國學)에 고구려인의 입학을 요청하는 등 겉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척하였지만, 당나라는 사절을 파견하여 고구려가 수군(隋軍)격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경관(京觀)을 파괴한다든지(631), 고구려의 내정과 지리를 정탐하기까지 하여(641), 양국의 긴장관계는 점차 고조되어 나갔던 것이다.


   또한, 고구려도 당나라와의 대결이 불가피함을 인식하고, 631년부터 천리장성을 수축하기 시작하여 그뒤 16년간에 걸쳐 완성을 보게 되었다. 당나라와 이같이 형식적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고구려는 남으로 잃었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신라와 사투를 계속하였다. 629년 낭비성(娘臂城)을 빼앗기는가 하면, 638년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는 등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같이 대외관계가 긴장된 가운데, 왕은 당시 천리장성의 수축을 감독하고 있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제거하려다가, 642년 오히려 그에 의하여 몸이 토막나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왕과 연개소문간의 알력의 원인이 어떠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왕권을 강화하려던 왕의 의도에 연개소문이 장애가 되었던 듯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대당(對唐) 외교정책 등의 이견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舊唐書
新唐書
淵蓋蘇文에 대한 若干의 存疑(李弘植, 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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