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정태후(宣靖太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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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태후(宣靖太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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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종(熙宗)
1181(명종 11)∼1237(고종 24)
고려의 제21대 왕
재위 1204∼1211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영, 초명은 덕(悳). 자는 불피(不陂). 신종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정화태후(靖和太后) 김씨(金氏)이며, 비(妃)는 영인후 진(寧仁侯#진27)의 딸인 성평왕후(成平王后)이다.
1200년(신종 3)에 태자로 책봉되고 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1205년(희종 1)에 최충헌(崔忠獻)을 진강군개국후(晋康郡開國侯)에 봉하였으며 1206년에 다시 진강후(晋康侯)에 봉하고 흥녕부(興寧府)를 세우게 하였다.
1207년 최충헌의 청으로 유배자 300여명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 방면하였다. 1208년 개성 대시(大市) 좌우의 긴 행랑(行廊) 1,080영(楹)을 다시 짓게 하였는데 오부방리(五部坊里)와 양반의 집에서 미속(米粟)을 내게 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당시 정권을 휘두르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도리어 최충헌에게 폐위를 당하여 강화로 쫓겨났다가 뒤이어 자란도(紫鸞島)로 옮겨졌고, 1215년(고종 2) 다시 교동으로 옮겨졌다가 1219년 서울에 봉영(奉迎)되었다. 이렇게 서울에 돌아와서 딸 덕창궁주(德昌宮主)를 최충헌의 아들 성(珹)과 혼인시켰다.
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최우(崔瑀)에 의하여 다시 강화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져 1237년에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죽었다. 강화에 장사하여 능을 석릉(碩陵)이라 하였다. 시호는 성효(誠孝)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신종(神宗)
1144(인종 22)∼1204(신종 7)
고려의 제20대왕
재위 1197∼1204
본관은 개성
이름은 탁(晫), 초명은 민(旼), 자는 지화(至華). 의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명종의 동모제이고, 비(妃)는 강릉공(江陵公) 김온(金溫)의 딸인 선정태후(宣靖太后)이다.
평량공(平凉公)에 봉해진 뒤 최충헌(崔忠獻)형제가 명종을 폐하고 왕으로 추대하여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1198년(신종 1)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두었고, 관서(關西)민가의 안대(방앗간을 차림.)를 금하였다. 그해 사노(私奴) 만적(萬積)의 난이 일어난 것을 비롯하여 이듬해에는 명주(溟州:지금의 江陵)·동경(東京:지금의 慶州), 뒤이어 진주(晉州)·전주·합주(陜州:지금의 陜川) 등지에서 민란이 계속 일어났다.
1199년에 최충헌이 문무관의 전주(銓注:人事行政)를 도맡아 행하였는데, 이로부터 모든 실권은 최충헌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해 수양장도감(輸養帳都監)과 오가도감(五家都監)을 두었다.
1202년에 탐라(耽羅:지금의 濟州道)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소부소감(少府少監) 장윤문(張允文)과 중랑장(中郎將) 이당적(李唐積)을 안무사(安撫使)로 보내어 평정하였다.
1204년 등창이 심하여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며, 능은 양릉(陽陵)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