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世祖)


1417(태종 17)∼1468(세조14).
조선 제7대왕.
재위 1455∼1468.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유(瑈).
자는 수지(粹之).



1.가계 및 대군시절


세종의 둘째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 왕비는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이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明敏)하여 학문도 잘하였으며,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 진평대군(晉平大君)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쳐 봉해졌다. 그가 대군으로 있을 때는 세종의 명령을 받들어 궁정 안에 불당을 설치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고 승려 신미(信眉)의 아우인 김수온(金守溫)과 함께 불서(佛書)의 번역을 감장(監掌)하고, 또, 향악(鄕樂)의 악보(樂譜)도 감장, 정리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관습도감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았다.



2. 계유정란과 즉위


이해 5월에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니 7월부터 그는 측근 심복인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정국전복의 음모를 진행시켜 이듬해 1453년(단종 1) 10월에는 이른바 계유정난을 단행했던 것이다. 계유정난은 폭력으로써 정권을 탈취한 사건인데, 하룻밤 사이에 정국을 전복시키고 군국(軍國)대권을 한 손에 쥐고 자기 심복을 요직에 배치하여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조정 안에 있는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밖에 있던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이징옥(李澄玉)마저 주살, 내외의 반대세력을 제거하였다. 1455년 윤 6월 단종에게 강박하여 왕위를 수선(受禪)하였다.



3. 개혁정치


세조가 즉위하여서는 이해 8월에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에게 명하여 우리나라의 지리지(地理誌)와 지도를 찬수(撰修)하게 하였으며 11월에는 춘추관(春秋館)에서 《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1456년(세조 2) 6월에 좌부승지 성삼문(成三問) 등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단종복위를 계획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자 이 사건에 관련된 여러 신하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뒤따라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경연(經筵)을 정지시켰으며, 집현전에 장치(藏置)된 서적은 모두 예문관(藝文館)에 옮겨 관장하게 하였다.

7월에 조선단군(朝鮮檀君)의 신주(神主)를 조선시조단군(朝鮮始祖檀君)의 신위(神位)로 고쳐 정하고, 후조선시조(後朝鮮始祖) 기자(箕子)를 후조선시조 기자의 신위로 고쳐 정하고, 고구려시조를 고구려시조 동명왕의 신위로 고쳐서 정하였다. 1457년(세조 3) 정월에 비로소 원구단(圓丘壇)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내고 조선 태조를 여기에 배향하였다. 이해 6월에 상왕(上王:端宗)을 사육신의 모복사건(謀復事件)에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써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여 강원도 영월에 유배시켰는데, 뒤따라 경상도의 순흥에 유배된 노산군의 다섯째 숙부인 금성대군 유(錦城大君瑜)가 노산군복위를 계획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신숙주(申叔舟)·정인지(鄭麟趾) 등 대신의 주청(奏請)에 따라 이해 10월에 사사(賜死)하고 노산군도 관원을 시켜 죽이게 하였다.



4. 법전과 제도개혁


1458년에 호패법(號牌法)을 다시 시행하여 국민의 직임(職任)과 호구(戶口)의 실태를 파악하고 도둑의 근절에 주력하였다. 이해에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수하였으니, 즉 태조·태종·세종·문종 4대의 치법(治法)·정모(政謨)를 편집하여 후왕의 법칙으로 삼으려는 의도이고, 후에 《동국통감》을 편찬하게 하였으니 이는 전대(前代)의 역사를 조선왕조의 의지에 의하여 재조명한 것이다. 세조는 정정이 안정됨에 따라 왕조정치의 기준이 될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였으니 최항(崔恒) 등에 명하여 앞서 있었던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정비, 왕조 일대(一代)의 전장(典章)인 《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하였다. 1460년에 호전(戶典)을 반행(頒行)하고 이듬해 1461년에는 형전(刑典)을 반행하였다.

세조는 무비(武備)에 더욱 유의하여 1462년에는 각 고을에 명하여 병기(兵器)를 제조하게 하고, 1463년에는 제읍(諸邑)·제영(諸營)의 둔전(屯田)을 성적(成籍)시키고, 1464년에는 제도(諸道)에 군적사(軍籍使)를 파견하여 장정(壯丁)의 군적누락을 조사하게 하였다. 또, 1466년에는 관제를 고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는 영의정으로, 사간대부(司諫大夫)는 대사간으로,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는 관찰사로,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는 오위도총관으로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는 병마절도사로 명칭을 간편하게 정하였으며, 종래의 시직(時職:현직)·산직(散職)관원에게 일률적으로 나누어주던 과전(科田)을 그만두고 현직의 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職田制)를 시행하였다.

세조는 신하들을 통솔함에 있어 자기에게 불손하는 신하는 가차없이 처단하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신하는 너그럽게 대하였으니, 양산군(楊山君) 양정(楊汀)은 정난(靖難)의 원훈(元勳)으로서 북변(北邊)의 진무(鎭撫)에 공로가 많았는데도 세조에게 퇴위를 희망하는 불손한 말을 한 이유로 참형에 처하고,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은 세력을 믿고 방자하여 제 가신(家臣)을 놓아 사람을 살해까지 하였는데도, 자기에게 항상 순종한다는 이유로 주의만 시켰을 뿐 처벌하지 않았다. 세조는 왕권을 확립한 뒤 지방의 수신(帥臣:병마절도사)은 그 지방출신의 등용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이를 대체시키자 이에 반감을 품은 함길도 회령출신 이시애(李施愛)가 1467년에 지방민을 선동하여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세조는 이 반란을 무난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공고히 수립하였다.



5. 문화사업


세조는 민정에 힘을 기울여 공물대납(貢物代納)의 금령(禁令)을 거듭 밝히고, 잠서(蠶書)를 우리말로 해석하고, 국민의 윤리교과서인 《오륜록 五倫錄》을 찬수하게 하였으며, 또 문화사업에는 《역학계몽도해 易學啓蒙圖解》·《주역구결 周易口訣》·《대명률강해 大明律講解》·《금강경언해 金剛經諺解》·대장경(大藏經)의 인쇄와 태조·태종·세종·문종의 어제시문(御製詩文)의 편집, 발간 등을 들 수가 있으며, 외국과의 관계는 왜인(倭人)에게는 물자를 주어 그들을 무마, 회유시키고, 야인(野人:女眞族)에게는 장수를 보내어 토벌, 응징시키고, 또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李滿住)를 목베어 국위를 선양하기도 하였다.



6. 왕권강화책


그러나 세조는 정치운영에 있어서는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이른바 ‘하의상통(下意上通)’보다는, 다만 자기의 소신만을 강행하는 ‘상명하달(上命下達)’식의 방법을 택하였다. 세조는 즉위 직후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의정부의 서사제(署事制)를 폐지하고 육조의 직계제(直啓制)를 시행하였으니, 이것은 어린 단종 때의 정치의 권한이 의정부의 대신들에게 위임된 것을 육조직계제를 시행함으로써 왕 자신이 육조를 직접 지배하여 중신(重臣)의 권한을 줄이는 반면, 왕권의 강화를 기도하였던 것이다.

1456년 6월에 성삼문·박팽년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의 발생을 계기로 학문연구의 전당인 집현전을 폐지하고, 정치문제의 대화 토론장인 경연을 정폐시켰으니, 이런 까닭으로 국정의 건의규제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되는 반면에, 왕명의 출납기관(出納機關)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즉, 이 시기의 승정원은 육조소관의 사무 외에 국가의 모든 중대사무의 출납도 관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승정원 직무의 중요성에 대비하여 그 직무를 맡은 관원은 반드시 국왕의 심복으로 임명하였으니, 신숙주·한명회·박원형(朴元亨)·구치관(具致寬) 등 정난공신(靖難功臣)이 이 승정원에 봉직하면서 모든 국정에 참획(參劃)하게 되었다.

또, 세조는 국가의 모든 정무를 이들 중신중심으로 운영하였으므로 정부의 중요관직은 자기의 심복인 대신급의 중신으로 겸무하게 하였으니, 즉 외교통인 신숙주는 겸예판(兼禮判)으로, 군사통(軍事通)인 한명회는 겸병판(兼兵判)으로, 재무통(財務通)인 조석문(曺錫文)은 겸호판(兼戶判)으로, 장기간 재직, 복무하게 하였다. 또, 중신들은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부원군(府院君)의 자격으로서 종전대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와같이, 국가의 모든 정무는 세조 자신이 직접 중신과 서로 의논, 처결하게 되니 국왕의 좌우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의 임무는 한층 더 중요해졌고, 따라서 승정원의 기구는 점차 강화되어 이러한 추세하에서 1468년에는 원상제(院相制)의 설치를 보게 된 것이다. 이 원상은 왕명의 출납기관인 승정원에 세조 자신이 지명한 삼중신(三重臣:신숙주·한명회·구치관)을 상시 출근시켜 왕세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 결정하도록 한 것이니, 이는 세조가 말년에 와서 다단한 정무의 처결에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또 후사의 장래문제도 부탁하려는 의도에서 설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세조는 1468년 9월에 병이 위급해지자,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왕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는 그 이튿날에 죽었으니,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집중시켰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세조대의 정치는 그 실행면에서 하의상통보다는 상명하달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정국 전체의 경색을 초래하여 사회 도처에 특권 횡행의 비리적 현상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세조의 무단강권정치는 왕권강화면에서는 일단 긍정할 수도 있지마는, 정치발전면에서는 세종·성종의 문치대화정치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 여겨진다. 시호는 혜장(惠莊)이고, 존호는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며, 묘호는 세조, 능호는 광릉(光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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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端宗)


1441(세종 23)∼1457(세조 3).
조선 제6대왕.
재위 1452∼1455.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홍위(弘暐).

아버지는 문종이며,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 비는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宋氏)이다.



1. 등극당시 상황


1448년(세종 30) 8세 때 의정부의 청으로 왕세손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해 문종이 왕세자를 위하여 처음으로 서연을 열고 사(師)·빈(賓)들과 상견례를 행할 때, 좌빈객 이개(李塏)와 우사경 유성원(柳誠源)에게 왕세자의 지도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경복궁 천추전(千秋殿)에서 죽자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즉위에 즈음하여 나이가 어려 정치하는 일에 어두우니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서로 의논하여 시행할 것과, 승정원은 왕명출납을 맡고 있으므로 신하들의 사사일은 보고하지 말도록 교서를 내렸다. 문종의 고명을 받은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이 측근에서 보좌하고, 집현전학사출신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신숙주(申叔舟)·이개·유성원 등은 지난날 집현전에서 세종으로부터 보호를 부탁받았으므로 이들이 측근에서 협찬하였다.

이해 윤9월, 저녁 강의에서 《논어》를 강론할 때 왕이 ‘사무사(思無邪)’라는 문구의 뜻을 묻자 박팽년은 “생각하는 바가 간사함이 없는 마음이 바름을 이른 것이며, 마음이 바르게 되면 일마다 바르게 되는 것”이라 대답하였다. 10월 박팽년을 집현전부제학으로 삼았는데, 그의 학문이 정밀, 심오하여 경연에 강의할 때마다 자신의 배움에 깨달은 바가 많았으므로, 특별히 통정대부에 가자시켜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해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신숭겸(申崇謙)과, 유금필(庾黔弼)·서희(徐熙)·강감찬(姜邯贊)·윤관(尹瓘)·김부식(金富軾)·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김방경(金方慶)·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芳實)·정몽주(鄭夢周) 등을 왕씨(王氏)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도록 하였다.



2. 수양대군의 권력찬탈


1453년(단종 1) 4월 경회루에 나가서 유생들을 친히 시험 보이고, 또 모화관에 가서 무과를 베풀었는데 권언(權躽) 등 40명이 뽑혔다. 온성과 함흥의 두 고을에 성을 쌓고, 나난(羅暖)·무산(茂山)의 두 성보(城堡)를 설치하였다. 악학제조 박연(朴堧)이 세종의 《어제악보 御製樂譜》를 인쇄, 반포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를 허가하였다. 왕이 대신 황보 인·김종서·정분(鄭苯) 등을 불러 그들에게 자문하여 박중림(朴仲林)을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이해 10월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빼앗고자 자기 측근인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의 계책에 따라 무사를 거느리고 가서 좌의정 김종서는 그의 집에서 죽이고, 영의정 황보 인,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민신(閔伸), 우찬성 이양(李穰) 등은 대궐에 불러와서 죽였다. 이들의 죄명은 작은아버지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다는 것이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므로 일의 옳고 그름을 가리기도 전에 정권은 수양대군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요구에 따라 수양대군을 영의정으로 삼아 군국의 중대한 일을 모두 위임시켜 처리하게 하였다. 또, 당시 거사에 참가한 사람들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인정하여 모두 공신의 칭호를 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지칭한 난리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 아들 우직(友直)은 조신들의 주청에 의하여 강화의 교동현(喬桐縣)에 이치(移置)되었다가 안평대군은 사사되고 우직은 진도로 옮겨 안치되었다. 이 일련의 조처는 왕의 의사가 무시된 집권자인 수양대군의 주변인물들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이해 하위지를 좌사간, 성삼문을 우사간, 이개를 집의, 유응부를 평안도도절제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3. 수양대군의 집권과 단종의 폐위


정치의 실권을 잡게 된 수양대군은 지방에도 자기 세력을 심기 위하여 지방관을 교체시키던 중 이징옥(李澄玉)의 난을 겪기도 하였다. 한편, 양성지(梁誠之)로 하여금 《조선도도 朝鮮都圖》·《팔도각도 八道各圖》를 편찬하게 하였다. 1454년 정월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이 달에 직집현전 양성지가 《황극치평도 皇極治平圖》를 찬진하고, 3월 춘추관에서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5월 좌승지 박팽년이 경연에서 왕에게 안일과 태만을 경계하도록 진언하였는데, 이는 왕이 대궐 안에서 자주 활쏘기를 구경하면서 경연을 여려 차례 정지시켰기 때문이었다. 8월 각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하여 효자(孝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와 공평, 청렴하고 현저히 공적이 있는 수령을 상세히 기록하여 알리도록 하였는데, 이는 그들을 발탁, 등용하여 권장하기 위해서이었다. 보루각(報漏閣)을 수리하고 《고려사》를 인쇄, 반포하였다. 12월 각 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하여, 둔전(屯田)설치계획을 수립하여 알리도록 하였다.

1455년 윤6월 수양대군이 조정의 제신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하의 여러 종친·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각 지방에 유배시키기를 청하자,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 이러한 급박한 주변정세에 단종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 살았다.

1456년(세조 2) 6월 상왕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복위사건의 주동인물은 지난날 집현전학사 출신인 몇몇 문신과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 등 무신들이었다. 이들은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며, 또 원손(元孫:端宗)을 보호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으므로 어린 상왕을 복위시키는 것은, 곧 이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이며 선비의 행할 의무이기도 하였다. 이때 마침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대하여 연회하는 날, 그 자리에서 세조를 죽이고 측근 세력도 제거한 뒤 단종을 복위시키려 하였으나, 그 계획이 실행되기도 전에 동모자인 김질(金礩)의 고발에 의하여 결국 실패하고, 이 사건의 주동인물 중 많은 사람이 사형을 받게 되었다.

단종은 이 사건이 있은 뒤 더욱 불안을 느끼고 있었는데, 조신 가운데 상왕도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서울에서 내쫓자는 주청이 있자, 1457년 6월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영월에서 유폐생활을 하는 동안, 매양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올라 시를 지어 울적한 회포를 달래기도 하였다. 이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노산군의 작은아버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다가 10월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 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전 현감 신규(申奎)의 상소에 의하여 복위시키기로 결정되었다. 시호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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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文宗)


1414(태종 14)∼1452(문종 2).
조선 제5대왕.
재위 1450∼1452.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향(珦), 자는 휘지(輝之).

세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이고, 비는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이다. 1421년(세종 3)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50년 37세로 왕위에 올랐다. 학문을 좋아하였고 학자(집현전 학사)들을 아끼고 사랑하였다.

부왕인 세종은 일찍부터 신체상의 각종 질환으로 1437년 벌써 세자(문종)에게 서무(庶務)를 결재하게 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1442년 군신(群臣)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자가 섭정(攝政)을 하는 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하였고 첨사(詹事)·동첨사(同詹事) 등의 관원을 두었다. 또한, 세자로 하여금 왕처럼 남쪽을 향하여 앉아서 조회(朝會)를 받게 하였고(南面受朝), 모든 관원은 뜰 아래에서 신하로 칭하도록 하였으며,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서무는 모두 세자의 결재를 받으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조당(受朝堂)’을 짓고 세자가 섭정을 하는 데 필요한 체제를 마련하였으며, 1445년부터는 세자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이 섭정은 세종이 죽기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문종은 즉위하기 전에 실제 정치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따라서, 문종시대의 정치의 방법과 분위기는 세종 후반기의 그것과 크게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세종대에 비하여 약간 위축되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안평대군(安平大君) 등 종친(宗親)세력의 심상하지 않은 움직임도 이미 이때부터 나타나고 있었으며, 이를 견제하기 위한 언관(言官:臺諫)의 종친에 대한 탄핵언론으로 상호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언관의 언론은 정치 전반에 걸쳐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특히 척불언론(斥佛言論)이 눈에 띈다. 그것은 세종 말기 세종의 호불적 경향(好佛的傾向)에 대한 유신(儒臣)의 반발로 해석된다. 즉, 세종 말기 세종과 왕실에 의하여 이루어진 각종 불교행사와 내불당(內佛堂)의 건설 등 불교적 경향을 방지하는 데 실패한 유자적(儒者的)인 언관(言官)들은 문종이 즉위하자 왕실에서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 노력하였다. 당시 언관의 언론은 왕권이나 그밖의 세력에 구애되지 않고 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자주 구언(求言)하였고, 언로(言路)가 넓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조신(朝臣)6품 이상에 대하여는 모두 윤대(輪對)를 허락하였으며, 비록 벼슬이 낮은 신하에 대하여도 부드럽게 대하면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였다.

문종조에 편찬된 서적으로는 《동국병감 東國兵鑑》·《고려사》·《고려사절요》·《대학연의주석 大學衍義註釋》 등이 있다. 《고려사》는 정도전(鄭道傳) 등의 《고려국사 高麗國史》 이래 여러 차례 개수(改修)·교정이 있었으나, 만족할만한 것이 못되어 1449년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개찬(改撰)을 명하여 1451년(문종 1)에 완성을 본 것이며, 기전체의 《고려사》 편찬이 완성된 직후 새로이 편년체로 편찬에 착수하여 1452년에 완성된 것이 《고려사절요》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은 전 왕조의 역사의 정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정치·제도·문화의 정리를 위하여도 필요한 작업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 사업이었다.

군사제도에 있어서도, 1445년에 10사(司)에서 12사로 개정되었던 것을 1451년에 5사로 개편하였다. 문종은 그가 세자로 있을 때부터 진법(陣法)을 편찬하는 등 군정(軍政)에 관심이 많았는데, 즉위 후 군제의 개혁안을 스스로 마련하여 제시하였고, 재위 2년여에 걸쳐 이루어진 군제상의 여러 개혁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가진 것이었다.

문종의 학문은 유학(儒學:性理學)뿐 아니라 천문(天文)과 역수(曆數) 및 산술(算術)에도 정통하였고, 예·초·해서(隷·草·楷書) 등 서도에도 능하였다. 그러나 문종은 몸이 허약하여 재위 2년4개월 만에 39세로 병사하고, 나이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함으로써, 계유정난, 세조의 찬위(纂位), 사육신사건 등 정치적으로 불안한 사건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호는 공순(恭順)이며, 능은 현릉(顯陵)으로 양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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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世宗)

1397(태조 6)∼1450(세종32).
조선 제4대왕.
재위 1418∼1450.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



1. 가계


태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왕후민씨(元敬王后閔氏)이고, 비는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進封)되었으며, 1418년 6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같은해 8월에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2. 즉위과정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었으나 개와 매〔鷹〕에 관계된 사건을 비롯한 세자의 일련의 행동과 일들이 태종의 선위에 대한 마음을 동요시켰으며, 또한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안정과 왕권을 이어받아 훌륭한 정치를 펴기에 양녕대군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태종의 마음이 이미 세자 양녕대군에게서 떠난 것을 알게 된 신료(臣僚)들은 그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소(疏)를 올려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즉, 태종에게는 왕후 민씨 소생으로 양녕·효령(孝寧)·충녕·성녕(誠寧) 등 네 대군이 있었는데, 이때 양녕대군은 벌써 두 아들이 있었으므로 그를 폐하고 새로이 세자를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세자폐립에 대한 의론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마음은 이미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쏠려 있었다. 1418년 6월에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 하여 그를 세자로 책봉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이처럼 충녕대군에 대한 세자책봉은 태종의 뜻에 따라 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대부분의 신하들도 이를 환영하였다. 두달 뒤인 1418년 8월 10일 태종의 내선(內禪)을 받아 세자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세종이다.



3. 유교정치의 기틀마련


세종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즉,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가 배양되었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가 정비되었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이 이루어졌다. 또, 훈민정음의 창제, 농업과 과학기술의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貢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하여 민족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세종 4년까지는 태종이 상왕으로 생존하여 있었으므로 태종의 영향이 계속된 시기였다. 1414년(태종 14)에 이룩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는 의정부 대신의 정치적 권한을 크게 제약하고 왕권의 강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인데, 세종은 이러한 정치체제를 이어받아 태종대에 이룩한 왕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소신있는 정치를 추진할 수 있었다.

세종대는 개국공신세력은 이미 사라지고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한 유자적(儒者的)관료와 유자적 소양을 지닌 국왕이 서로 만나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던 시기였다. 세종대의 권력구조나 정치적인 분위기는 세종 18년을 전후로 하여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세종 18년에는 육조직계제가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개혁된 정치체제상의 변혁이 있었고, 이듬해는 세자(世子:뒤의 문종)로 하여금 서무(庶務)를 재결(裁決)하도록 하였으며 그 이전에 비하여 정치적 분위기는 더욱 안정되고 유연하게 되어갔다. 따라서, 언관(言官)과 언론에 대한 왕의 태도도 비교적 강경한 자세를 보였던 그 이전에 비하여 훨씬 자유롭고 부드러워져서 이들에 대한 탄압이나 징계는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와같이 정치적 분위기가 변한 원인은 유교정치의 진전에서 찾을 수도 있다. 즉, 세종 전반기에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학자가 양성되었고, 그 학자들이 동원되어 유교적 의례·제도의 정리와 수많은 편찬사업이 이룩되어 유교정치기반이 진전되었고 세종 18년에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의 이행도 유교정치의 진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정치체제로 변화하게 된 더 중요한 원인은 왕의 건강문제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일찍이 신병때문에 고통을 받아왔으므로, 정무가 왕에게 폭주하는 육조직계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즉, 유교정치를 펼 수 있었던 기틀은 정치적·제도적·문화적 기반의 성립, 왕권의 안정, 그리고 왕의 건강의 악화 등에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세종 전반기와 그 후반기의 정치적 분위기를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후반기에 왕의 건강이 극히 악화되기는 하였으나 의정부서사제 아래에서 군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성세를 구가한 시대였다. 황희(黃喜)를 비롯, 최윤덕(崔潤德)·신개(申槩)·하연(河演) 등 의정부 대신들은 중후하고 온건한 자세로 왕을 보좌하였고, 관료들의 정치기강도 그 전후에 비하여 건전하였으며, 언관의 언론도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구현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러한 정치체제와 정치적 분위기도 세종시대를 이룩하는 데 작용한 요소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집현전은 세종과 세종대를 운위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기관이다. 집현전은 중국과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제도였고 조선초 정종대에도 설치된 일이 있으나, 조선시대의 집현전이라고 하면 세종 2년 3월에 설치한 것을 의미한다. 이때에 집현전을 설치하게 된 목적은 조선이 표방한 유교정치와 대명(對明)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에 있었다. 이에 따라 유망한 소장학자들을 채용하여 집현전을 채웠고, 그들에게 여러가지 특전을 주었으며,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내려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에 소속된 관원은 경연관·서연관·시관(試官)·사관(史官)·지제교의 직책을 겸하였고,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거나 각종 서적의 편찬사업에 동원되는 등 그들의 직무는 주로 학술적인 것이었다. 왕은 이들이 학술로써 종신할 것을 희망하였으므로 다른 관부에는 전직도 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10년에서 20년 가까이 있게 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쟁쟁한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이러한 인적자원이 바로 세종대의 찬란한 문화와 유교정치의 발전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유교적인 의례·제도의 정리는 유교정치의 기본이 되는 작업으로서, 이를 위하여 중국의 옛 제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였다. 중국의 옛 제도에 대한 관심은 개국초부터 있어왔으나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바로 세종이 즉위한 이후부터였으며, 그 중심이 된 기관도 예조·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집현전 등이었다. 이러한 기관에서 국가의 유교적 의례인 오례(五禮:吉禮·嘉禮·賓禮·軍禮·凶禮)와 사서(士庶)의 유교적 의례인 사례(四禮:冠禮·婚禮·喪禮·祭禮) 등 유교적인 제반 제도가 정리되었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의례·제도의 틀은 세종대에 짜여져서 유교정치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에 정리된 의례·제도의 틀은 중국의 옛 제도에 의한 것이었으나 왕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를 비판, 연구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주체성을 견지하였던 것이다.



4. 편찬사업의 융성


세종대에 전개된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은 이 시대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데 기본이 되었다. 이 사업을 통하여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정리가 이루어졌고 정치·제도의 기틀이 잡혀갔다. 이 사업의 주도자는 물론 세종이었고, 이 일을 담당한 것은 집현전과 여기에 소속된 학자들이었다. 또, 이 사업은 집현전 학자들의 학문이 향상되고 일할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진 세종 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이 편찬물을 내용별로 분류하면 역사서, 유교경서, 유교윤리와 의례, 중국의 법률 및 문학서, 정치귀감서, 훈민정음·음운·언역(諺譯)관계서, 지리서, 천문·역수서, 농서 등으로 다양하고 방대한 것이었다. 즉, 정치·법률·역사·유교·문학·어학·천문·지리·의약·농업기술 등 각 분야에 걸쳐 종합정리하는 사업이었고, 이 작업을 통하여 이 시대의 문화수준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5. 훈민정음의 창제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임에 틀림없다. 세종은 집현전을 통하여 길러낸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 등 소장 학자들의 협력을 받아 우리 민족의 문자를 창제하였던 것이니, 이 시대의 문화의식과 그 수준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6. 과학기술의 발전과 기술서적의 편찬


이 시기는 과학과 기술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크게 발전을 보았다. 천문대와 천문관측기계 방면에서의 발전이 이러한 측면의 하나로 꼽힌다. 조선 초기 서운관에는 천문을 관측하기 위하여 두 곳에 간의대(簡儀臺)를 설치한 바 있으나, 이것은 아주 미흡한 것이었다. 세종 14년부터 시작된 대규모의 천문의상(天文儀象)의 제작사업과함께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높이 약 6.3m, 길이 약 9.1m, 넓이 약 6.6m의 석축간의대가 세종 16년에 준공되었고,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渾天儀)·혼상(渾象)·규표(圭表)와 방위(方位) 지정표(指定表)인 정방안(正方案) 등이 설치되었다. 세종 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의 관원들이 매일밤 천문을 관측하였다. 이러한 간의대와 그 중요한 시설물들은 중국과 이슬람의 영향과 전통적인 요소들이 함께 들어 있는 것이었다.

혼천의는 천체관측기계로서 문헌상으로는 세종 15년 6월에 만들어진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며, 같은해 8월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는데 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고전(古典)을 조사하게 하는 한편 장영실(蔣英實) 등 기술자들에게 실제 제작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天球儀)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하여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과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어서 일종의 천문시계의 성격도 가졌다.

또한,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와 물시계도 제작되었다. 해시계로는 앙부일구(仰釜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있고, 물시계로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가 있다. 앙부일구는 우매한 백성들을 위하여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쪽의 거리에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公衆時計)였고,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휴대용시계였으며, 정남일구는 매우 정밀한 해시계로 이것으로 관측하면 자연히 남쪽이 정해지면서 시각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시계는 갠 날과 낮에만 쓸 수 있는 것이므로, 공적인 표준시계로는 물시계가 더 유용하였는데 자격루가 그것이다. 자동시보장치가 붙은 물시계인 자격루는 세종이 크게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장영실을 특별히 등용하여 이의 제작에 전념하게 하여 세종 16년에 완성하였는데, 그것은 경복궁 남쪽의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어 조선시대의 표준시계로 이용하였다. 세종 20년에는 장영실에 의하여 또 다른 자동물시계이며 천상시계인 옥루가 완성되었다.

세종은 천문·역서(曆書)의 정리와 편찬에도 큰 관심을 가져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칠정산외편 七政算外篇》·《제가역상집 諸家曆象集》 등이 편찬되었다. 세종 15년에는 정인지·정초·정흠지(鄭欽之)·김담(金淡)·이순지(李純之) 등에게 《칠정산내편》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세종 24년에 완성되어 2년 만에 간행되었다. 《칠정산외편》도 이순지·김담에 의하여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가장 완전한 이슬람 천문학서의 번역본이라 하겠다. 이 《칠정산내외편》의 편찬으로 조선의 역법(曆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또한, 세종 27년에는 이순지에 의하여 《제가역상집》이 편찬되었다. 이 책은 세종대에 이룩한 천문·역법의 총정리작업과 천문의상제작의 이론적 근거를 찾기 위한 고문헌(古文獻)조사사업의 결산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높은 수준의 중국 천문학사라고 평가할 수 있다.

측우기의 발명도 이 시기 과학기술의 발달에 있어서 주목할만한 업적이다. 농업국가인 조선시대에 있어서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은 매우 큰 뜻을 가진다고 하겠다. 측우기는 세종 23년 8월에 발명되어 새로운 강우량의 측정제도가 마련되었고, 그 미흡한 점은 이듬해 5월에 개량, 완성되었다. 이 측우기를 발명하여 강우량을 측정함으로써 농업기상학의 괄목할만한 진전을 이룩한 것이다. 또, 조선시대의 도량형제도도 세종대에 확정되었다. 즉, 세종 13년과 28년에 확정된 도량형제도가 그뒤 《경국대전》에 그대로 법제화되었다. 이 제도는 12율(律)의 기본음인 황종률(黃鐘律)을 낼 수 있는 황종관(黃鐘管)을 표준기(標準器)로 삼은 것으로서, 황종관의 길이는 자〔尺〕로 길이의 단위를 삼았고, 그 속에 담기는 물은 무게의 단위로 삼은 것이었다.

인쇄술에 있어서도 세종대는 특기할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1403년에 주조된 청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세종 2년에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고, 세종 16년에는 더욱 정교한 갑인자(甲寅字)를 주조하였다. 세종은 계미자 인쇄기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세종 2년에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와 인쇄기를 만들게 하여 활자의 주조와 인쇄기술상의 큰 발전을 가져왔다. 세종 16년에는 경자자보다 더 아름다운 자체인 갑인자의 주조사업이 이천(李蕆)의 감독하에 이루어져 20여만자의 크고 작은 활자가 주조되었고, 그뒤 세종 18년에는 납활자인 병진자(丙辰字)가 주조됨에 따라 조선시대의 금속활자와 인쇄술은 일단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한편, 화약과 화기(火器)의 제조에 있어서도 기술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세종대는 종래 중국기술의 모방에서 탈피하려는 독자적 경향이 나타나서 화포(火砲)의 개량과 발명이 계속되었다. 완구(碗口)가 개량되고, 소화포(小火砲)·철제탄환·화포전(火砲箭)·화초(火鞘) 등이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세종에게 있어서 아직 만족할만한 수준에 도달한 것은 못되었다. 세종 26년에 화포주조소(火砲鑄造所)를 짓게 하여 뛰어난 성능을 가진 새로운 규격의 화포를 만들어냈고, 이에 따라 이듬해는 화포의 전면 개주(改鑄)에 착수하였다. 세종 30년에 편찬, 간행된 《총통등록 銃筒謄錄》은 그 화포들의 주조법과 화약사용법 그리고 규격을 그림으로 표시한 책이었다. 이 책의 간행은 조선시대의 화포제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주목할만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세종대에는 농사법의 개량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 農桑輯要》·《사시찬요 四時纂要》 등과 우리나라 농서인 《본국경험방 本國經驗方》 등의 농업서적을 통하여 농업기술의 계몽과 권장을 하였으며 정초가 지은 《농사직설 農事直說》을 편찬, 반포하였다. 이 책의 반포는 조선시대 농업과 농업기술사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의약발명에도 세종대는 특기할만한 시대로서 《향약채집월령 鄕藥採集月令》·《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의방유취 醫方類聚》 등의 의약서적이 편찬되었다.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의 편찬은 15세기까지의 우리나라와 중국 의약학의 발전을 결산한 것으로 조선과학사에 있어서 빛나는 업적의 하나이다.

이 시대는 또 음악에 있어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시기였고, 그것은 세종의 지휘와 참여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유교정치에 있어서 중요시되는 것이 유교적 의례인데, 국가의 의례인 오례에는 그에 합당한 음악이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유교적인 의례의 정리와 함께 음악의 정리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세종의 음악적 업적은 크게 아악(雅樂)의 부흥, 악기(樂器)의 제작, 향악(鄕樂)의 창작, 정간보(井間譜)의 창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와같은 업적은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가진 세종이 박연(朴堧)과 같은 음악의 전문가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었다. 왕은 종래 미비하고 불완전한 아악을 바로잡기 위하여 박연 등을 시켜 중국의 각종 고전을 참고하여 아악기를 만들게 하고, 아악보를 새로 만들게 하여, 조회아악(朝會雅樂)·회례아악(會禮雅樂) 및 제례아악(祭禮雅樂) 등을 제정하였다. 그뒤 아악은 국가·궁중의례에 연주되었고, 본고장인 중국보다도 완벽한 상태로 부흥시킬 수 있었다.

이와같은 아악의 부흥은 그 악기의 국내생산과 직결된 문제로서 종래 중국에서 수입하였던 악기들을 국내에서 생산하였고, 특히 가장 중요한 악기인 편경(編磬)과 편종(編鐘)도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세종은 또한 박연으로 하여금 율관(律管)을 제정하게 하여 모든 악기의 음(音)을 조율(調律)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친히 〈정대업 定大業〉·〈보태평 保太平〉·〈발상 發祥〉·〈봉래의 鳳來儀〉 등 대곡(大曲)을 작곡하였다.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연주되는 여민악(與民樂)도 〈봉래의〉 일곱 곡 중 한 곡이며, 〈정대업〉과 〈보태평〉은 현재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은 또한 기보법(記譜法)을 창안하였으니, 곧 정간보(井間譜)가 그것이다. 정간보에 음의 시가(時價)와 박자를 표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종은 이 정간보를 사용하여 향악인 〈정대업〉·〈보태평〉·〈봉래의〉·〈봉황음 鳳凰吟〉·〈만전춘 滿殿春〉등을 기보하였다. 정간보는 세조대에 약간 개량된 것을 현재에도 국악에 사용하고 있다. 법제적 측면에서도 세종대는 유교적 민본주의·법치주의가 강화, 정비된 시기였다.



7. 법전의 정비


세종은 즉위초부터 법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세종 4년에는 완벽한 《속육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은 세종 8년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책과 《등록 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고, 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 新撰經濟續六典》 6권과 《등록》 6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뒤에도 개수를 계속하여 세종 17년에 이르러 일단 《속육전》 편찬사업이 완결되었다.

한편으로는 형벌제도를 정비하고 흠휼정책(欽恤政策)도 시행하였다. 세종 21년에는 양옥(凉獄)·온옥(溫獄)·남옥(男獄)·여옥(女獄)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造獄圖)를 각 도에 반포하였고, 세종 30년에는 옥수(獄囚)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諭示)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흠휼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에 대하여는 자자(刺字)·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고, 절도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또, 공법(貢法)을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전세제도(田稅制度)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은 관리의 부정으로 인하여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막심하였기 때문에 세종 12년에 이 법을 전폐하고 1결당 10두를 징수한다는 시안을 내놓고 문무백관에서 촌민에 이르는 약 17만명의 여론을 조사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세종 18년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집현전 학자들도 이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등 연구와 시험을 거듭하여 세종 26년에 공법을 확정하였다. 이 공법의 내용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결부법(結負法)의 종합에 의한 것이며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한편, 국토의 개척과 확장도 세종의 업적으로 빼놓을 수 없다. 두만강 방면에는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서 육진을 개척하게 하였고,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이와같은 사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이 문치(文治)만을 힘쓰지 않고 군사훈련, 화기의 제조·개발, 성진(城鎭)의 수축, 병선의 개량, 병서의 간행 등 국방책에도 힘을 기울인 결과인 것이다. 동쪽의 일본에 대하여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함께 썼다. 세종 1년에는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는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으나, 세종 8년에 삼포(三浦)를 개항하고, 세종 25년에는 계해약조를 맺어 이들을 회유하기도 하였다.



8. 불교에 대한 시책


유교정치를 표방한 조선은 개국초부터 억불책을 써왔고, 태종대에는 더욱 강화하였다. 세종도 불교에 대한 시책은 선대의 것을 따랐다. 왕실 중심의 기우(祈雨)·구병(救病)·명복(冥福) 등을 위한 불사(佛事)는 세종대에도 계속 이루어졌다. 세종은 유신(儒臣)들의 극단적인 불교전폐론에도 불구하고 조종상전(祖宗相傳)의 불교를 급히 없앨 수는 없다는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불교의 세속권을 재정리할 필요를 느껴 세종 1년에는 사사노비(寺社奴婢)를 정리하여 국가에 귀속시켰고, 세종 6년에는 불교의 종파를 선교(禪敎)양종으로 병합하였으며, 사사(寺社)·사사전·상주승(常住僧)의 액수를 재정리하였다. 즉, 선교 양종에 각 18사(寺)합 36사를 본사로 인정하고, 사원전은7, 760결(結), 상주승 3, 600인으로 삭감, 정리되었다. 법석송경(法席誦經)과 도성(都城)안에서의 경행(經行)도 파하였고, 궐내의 연등행사도 없앴으며, 여항(閭巷)에서의 연등도 승사(僧舍)이외에서는 일체 금하였다. 이처럼 세종의 불교에 대한 시책은 불교의 세속권의 정리·약화와 불교행사의 제한으로 나타났으나 왕실과 세종 개인적인 면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못하였다.

세종 14년에 효령대군이 한강에서 7일간의 수륙재(水陸齋)를 행하는 것을 막지 않았고, 세종 17년부터 24년까지는 흥천사(興天寺)의 사리각(舍利閣)·석탑(石塔)의 중수, 안거회(安居會)·경찬회(慶讚會)의 설행(設行)을 둘러싸고 유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하였다. 또, 세종 28년에 왕비 소헌왕후가 죽자 왕은 유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경(佛經)의 금서(金書)와 전경법회(轉經法會)를 강행하였으며, 세종 30년에는 모든 신하의 반대를 물리치고 내불당(內佛堂)을 세웠다. 세종의 불교에 대한 태도는 말년에 오면서 크게 변하는데 세종 26년에 광평대군(廣平大君), 그 이듬해에 평원대군(平原大君), 세종 28년에 왕후를 연이어 잃게 됨에 따라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왕 자신의 건강도 악화된 것이 그가 불교로 기우는 데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결과 세종 말년에 오면 세종과 유신간에 불교를 둘러싸고 격렬한 대립과 논란이 계속되는데 이와같은 현상이 발생한 것은 개국초부터 국가의 기본시책이 숭유억불이었으나, 유교는 정치이념·학문·철학·윤리적인 면의 욕구를 채워줄 뿐, 종교적인 욕구가 충족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풀이된다. 이러한 유불(儒佛)의 갈등 가운데에서도 세종대는 유교정치·유교사회의 기반이 다져진 시대였다.

이밖에도 금속화폐인 조선통보의 주조, 언문청(정음청)을 중심으로 한 불서언해(佛書諺解)사업 등을 폈고, 단군사당을 따로 세워 봉사하게 하고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묘를 사전(祀典)에 올려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또한, 종래 춘추관·충주의 두 사고(史庫)였던 것을 성주·전주 두 사고를 추가 설치하게 함으로써 임란중 전주사고본이 전화를 면하고 오늘날 조선 전기의 실록이 전해질 수 있게 한 사실 등도 기억해야 될 일이다.



9. 평가


세종대가 우리 민족의 역사상 빛나는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안정기반 위에 그를 보필한 훌륭한 신하와 학자가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나, 이들의 보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사람됨이 그 바탕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유교와 유교정치에 대한 소양, 넓고 깊은 학문적 성취,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판단력, 중국문화에 경도(傾倒)되지 않은 주체성과 독창성, 의지를 관철하는 신념·고집, 노비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던 인정 등 세종 개인의 사람됨이 당시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적 모든 여건과 조화됨으로써 빛나는 민족문화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슬하에 18남 4녀를 두었는데, 제1자는 문종, 제2자는 세조이다. 시호는 장헌(莊憲), 능호는 영릉(英陵)이며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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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太宗)

1367(공민왕 16)∼1422(세종 4).
조선 제3대 왕.
재위 1401∼1418.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

아버지는 태조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고, 비는 민제(閔齊)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1. 성장과정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길재(吉再)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으며, 일시 원천석(元天錫)을 사사하였다. 1383년(우왕 9)에 문과에 급제하고, 1388년(창왕 즉위년)부터 이듬해까지 고려왕실을 보호할 의도에서 감국(監國)요청의 사명을 띠고 명나라에 파견된 정사 문하시중 이색(李穡)의 서장관이 되어 남경(南京)에 다녀왔다.

1392년(공양왕 4)3월에는 이성계(李成桂)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은 것을 기화로 수문하시중 정몽주(鄭夢周)가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으로 하여금 공양왕에게 상소하게 하여 정도전(鄭道傳) 등 이성계파의 핵심인물을 유배시키고 이성계까지 제거하기를 도모할 때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으로 하여금 정몽주를 격살하게 함으로써 대세를 만회하였다. 같은해 정도전 등과 공작하여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이성계 추대를 결의하게 하고, 왕대비(王大妃:공민왕비 안씨)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게 한 뒤 이성계를 등위하게 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태조 1) 8월에 정안군(靖安君)으로 책봉되었을 뿐, 강비(康妃:태조의 계비)·정도전 등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과 개국공신책록에서 제외되고 세자책봉에서도 탈락되었다.

1394년 명나라에서 왕자를 입조시키라고 요청해 옴에 따라 남경에 가서 명나라 태조와 회견하고 생흔(生釁)·모만(侮慢)문제에서 비롯된 입명문제 등 대명관계를 타결하고 귀국하였다.



2. 즉위과정


1398년 정도전 일파에 의하여 요동정벌 계획이 적극 추진되면서 자신의 마지막 세력기반인 사병마저 혁파당할 단계에 이르자, 평소의 불만을 폭발시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도전과 세자 방석(芳碩) 등을 제거한 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정변 직후에는 여러 사정을 감안하여 세자로의 추대를 사양하였으며, 단지 정안공(靖安公)으로 개봉되면서 의흥삼군부우군절제사와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를 겸하였다. 또한 정사공신(定社功臣)을 논정하여 1등이 되었고, 이어 개국공신 1등에도 추록되었다. 1399년(정종 1)에 새로 설치된 조례상정도감판사(條例詳定都監判事)가 되었으며, 강원도 동북면의 군사를 분령(分領)하였다.

1400년 방간(芳幹)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포(朴苞) 등이 주동이 된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뒤 세자로 책봉되면서 내외의 군사를 통괄하게 되었다. 세자로 책봉되자 병권장악·중앙집권을 위하여 사병을 혁파하고 내외의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어 정무를 담당하게 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군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어 1400년 11월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등극하였다.



3. 왕권강화책


태종은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 확립을 위하여 공신과 외척을 대량으로 제거하였다. 1404년에는 3년 전에 있었던 이거이(李居易) 난언사건을 들추어 이거이 및 이저(李佇)를 귀향조처하였고, 1407년에는 불충을 들어 처남으로서 권세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형제를 사사하였다. 다시 1409년에는 민무구와 관련된 인물로 연계시켜 이무(李茂)·윤목(尹穆)·유기(柳沂) 등을 각각 목 베었다. 그뒤 1415년에는 불충을 들어 나머지 처남인 민무휼(閔無恤)·민무회(閔無悔)형제를 서인으로 폐하였다가 이듬해 사사하였고, 같은 해 이숙번(李叔蕃)도 축출하였다. 이와 함께 1414년에 잔여공신도 부원군으로 봉하여 정치일선에서 은퇴시켜 말년에는 왕권에 견제가 될 만한 신권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를 토대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단행하고 사전(私田)의 일부를 하삼도(下三道)로 이급하였다.



4. 중앙제도의 정비


1401년에 문하부를 혁파하면서 종래까지 의정부 합좌에 참여하였던 삼사·예문춘추관·삼군총제를 제외시키고 의정부 구성원으로만 최고국정을 합의하게 함으로써 의정부제를 정립하였다. 또한, 간쟁을 관장하던 문하부낭사(門下府郎舍)를 사간원으로 독립시켰으며, 삼사와 삼군부는 사평부(司平府)와 승추부(承樞府)로 개정하였다.

1405년에는 육조직계제로의 전환기도에 따른 의정부기능 축소와 육조기능 강화책으로 육조장관을 정3품 전서(典書)에서 정2품의 판서로 높였고, 전곡(錢穀)과 군기를 각각 관장하던 사평부와 승추부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호조와 병조로 이관시켰다. 한편 좌·우정승이 장악하였던 문무관의 인사권을 이조·병조로 이관하였다. 같은해에 대언사(代言司)를 강화하여 동부대언을 증설하고 6대언으로 하여금 육조의 사무를 분장하도록 하였으며, 육조의 각 조마다 세개의 속사(屬司)를 각각 설치하고 아울러 당시까지 존속한 독립관아 중에서 의정부·사헌부·사간원·승정원·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그 기능에 따라서 육조에 분속시켜 각각 육조로 하여금 관장하거나 지휘하게 하는 속사제도와 속아문제도(屬衙門制度)를 정하였다. 1414년에는 육조직계제를 단행하여 육조가 국정을 분장하도록 하면서 왕―의정부―육조의 국정체제를 왕―육조의 체제로 전환시켜 왕권과 중앙집권을 크게 강화하였다.



5. 지방제도의 정비


1403년과 1406년에 고려말 이래의 문란된 지방제도를 개편하려 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다가 1413년에 이르러서야 개편하였다. 즉, 이해 10월에 완산을 전주, 계림을 경주, 서북면을 평안도, 동북면을 영길도(永吉道), 각 도의 단부관(單府官)을 도호부, 감무(監務)를 현감으로 각각 고치고 아울러 군·현의 이름에 있는 ‘주(州)’자를 ‘산(山)·천(川)’자 등으로 개명하면서 1유도부(留都府)·6부(府)·5대도호부(大都護府)·20목(牧)·74도호부·73군·154현의 지방행정을 정비하였다.

이듬해 경기좌·우도를 경기도로 개칭하고, 1417년에는 평안·함길도의 도순문사(都巡問使)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도안무사(都安撫使)를 병마도절제사로 개칭하고 풍해·영길도를 황해·함경도로 개칭하면서 8도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밖에 1409년에 전라도 임내(任內)를 가까운 군·현으로 이속하면서 혁파하였고, 향·소·부곡도 가까운 군·현으로 이속시켜 점진적으로 소멸시켰다.



6. 군사제도의 정비와 국방의 강화


태종은 군사적인 무력을 배경으로 즉위한만큼 군사에 대한 관심이 극진하였다. 먼저 왕 개인을 위한 군사에 유의하여 즉위하던 해에 수하병을 갑사(甲士)로 편입하고, 의관자제(衣冠子弟) 중에서 무재가 있는 자를 뽑아 별시위(別侍衛)로 편성하였으며, 1404년에는 응양위(鷹揚衛)를 설치하였다. 1407년 내상직(內上直)을 내금위(內禁衛)로 개편하면서 자신이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을 특지(特旨)로써 기능을 헤아려 서용하였다. 1409년 내시위(內侍衛)를 설치하였으며, 10사(司) 중 9사를 시위사(侍衛司)로 개편하였다. 군사의 지휘체제에 있어서는 1401년 삼군부를 승추부로 개편하여 왕명출납과 군기를 장악하게 하였고, 1403년 삼군부를 삼군도총제부로 부활시키면서 승추부는 군기를, 도총제부는 군령을 나누어서 장악하게 하였다. 1405년 승추부를 병조에 귀속시켜 병조가 군사지휘권까지 장악하게 하였고, 1409년에는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를 설치하여 다시 병조는 군정을, 진무소는 군령을 담당하게 하다가 곧 삼군진무소를 의흥부(義興府)로 개칭하였다. 그뒤 1412년에 의흥부를 혁파하고 병조가 군정을 전장하게 하였다.

한편, 지방군은 1409년 11도(道)에 도절제사를 파견하였고, 1415년경까지 해안을 중심한 영진군(營鎭軍)·수성군(守城軍)을 정비하였으며, 1410년경부터는 군역에서 제외된 향리·공사노·교생 등으로 잡색군(雜色軍)을 조직하여 유사시에 내륙을 수호하게 하였다. 수군은 시위패(侍衛牌)의 일부를 수군으로 충당하여 강화하였고, 1403년에는 각 도마다 경쾌소선 10척씩을 만들어 왜구에 대비하게 하였고, 1410년부터 1412년까지 병선 200여척을 새로 만들었으며, 1413년부터 1415년까지는 거북선(이순신의 그것과는 구조가 다름.)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1412년과 1417년에는 선저(船底)에 석회를 발라 충해를 방지하는 축선법(畜船法)과 선저를 연기로 그을려서 충해를 방지하는 연훈법(烟熏法)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사법·경찰은 1402년에 고려말 이래의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를 순위부(巡衛府)로 개칭하였고, 1403년에 순위부를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로 개편하여 도적을 방지하면서 반역죄인 등을 사찰, 심문, 처벌하게 하였다.



7. 토지·조세제도의 정비


양전사업으로 1405년부터 이듬해까지 6도를 양전(量田)하고, 1411년부터 1413년에 걸쳐 평안도·함경도까지 양전함으로써 모두 120만여결의 전지를 확보하였다. 군자보충·조운타개·신권억압과 관련하여 사전(私田)의 지배를 강화하여 나갔는데, 1401년에 별사전(別賜田)을 혁파하여 새로 벼슬한 자에게 지급할 것을 정하였고, 이듬해는 과전법을 개정함으로써 종래까지 무세지였던 사원·공신전을 유세지로 편입하였다. 또한, 1405년에 1∼18과의 과전에서 5결씩을 감하여 군자전으로 충속하였으며, 외방거주를 원하는 전직관리의 과전은 5∼10결로 제한하였다.

이듬해에는 고려말의 전제개혁에서 제외되었던 사원전(寺院田)을 혁파하여 5만∼6만결을 새로이 확보하였고, 1409년에 한량관의 군전을 몰수하여 군자전으로 하고 공신전전급법(功臣田傳給法)을 정하여 공·사천인 자손과 기첩(妓妾)과 천첩의 공신전 전급을 금하였다. 1412년에는 원종공신전의 세습제를 폐지하고 외방에 퇴거한 자의 과전을 몰수하였다. 1414년에는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의 지급을 제한하면서 액수를 감하고, 군자전에서의 과전절급을 중지, 겸직이 없는 검교(檢校)를 폐지하였으며, 평양·영흥 토관(土官)의 수를 반으로 줄이면서 녹과의 3분의 2를 감하였다. 1417년에는 1403년 이래 7차에 걸친 사전의 이급논의를 매듭지으면서 각종 공신전·과전 등 총 11만5340결의 3분의 1을 충청도·경상도·전라도로 이급하고, 이속된 토지는 군자전으로 귀속시켰다.

한편, 조세정책으로 1408년에 공처노비의 신공(身貢)과 제주의 공부(貢賦)를, 1413년에 함경도·평안도의 공부를, 1415년에는 제주의 수조법과 맥전조세법을 정하였다. 그리하여 후반기에는 곡식을 보관할 창고를 대량으로 만드는 등 비축곡의 규모가 1413년에 356만8700석이던 것이 1417년에는 415만5401석에 이르렀다.



8. 대외정책


1401년 명나라 혜제(惠帝)로부터 고명(誥命)·인신(印信)을 받았으나 성조(成祖)가 계위하자 이듬해 하륜 등을 보내 등극을 축하하고 혜제가 준 고명·인신을 개급하여 줄 것을 요청, 1403년에 새 고명·인신을 받음으로써 대명관계를 정립시켰다. 이후 여진인과 입거 요동인을 둘러싸고 불편한 적도 있었고, 또 1년에 세 차례의 사신파견에 따른 조공과 처녀·환관·말·소 등의 무리한 진헌이 있기도 하였지만, 서적·약재·역서 등의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국기를 튼튼히 하는 명분을 얻었다.

한편, 왜인관계에서는 1407년에 흥리왜인(興利倭人)의 무역을 정하고 통교무역자의 입구를 입증하는 행장(行狀)을 발급하였고, 도박소(到泊所)를 부산포와 내이포(乃而浦)로 한정시켜 병비를 정탐하고 난언작폐함을 제약하였으며, 1414년에는 왜인범죄논결법을 정하였다. 1417년 경상도에서의 선박건조를 금하고, 이듬해 염포를 추가로 개방하였지만 왜인제약은 계속하였다. 이와 함께 입국왜인·왜선·체류시일·조어지(釣漁地) 등을 제한하였으며, 거주왜인들은 모두 내륙으로 이주시켜 왜구와의 내통을 근절시켰다. 여진에 대해서는 회유와 정벌 등의 강온책을 실시하였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404년에 상경시위제를 실시하고, 1406년에는 경성·경원에 무역소를 개설하였다. 서북국경의 개척은 1403년 강계부, 1413년 갑산군, 1416년 여연군을 각각 설치하면서 압록강까지 진출하였다. 그런데 동북면은 왕 초기에 경원부와 경성성을 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406년부터 1410년에 걸친 여진의 침입으로 경원부를 경성으로 옮기고 공주에 있는 덕릉(德陵)·안릉(安陵)을 함흥으로 옮겼으며, 1415년에 길주·영흥성을 축조하면서 1417년에야 경원부를 복설하였다. 그밖에 유구(琉球)·자바 등과도 교섭이 있었고, 유구로부터는 왜구에 의해 잡혀간 포로를 송환받기도 하였다.



9. 기타


위와 같이 정치·경제·사회·문화·대외정책과 함께 부수적인 정책사업으로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창덕궁·덕수궁·경회루·행랑·청계천을 조성하였으며, 별와요(別瓦窯)를 설치하고 초가를 개량하였다. 한편, 《경제육전원집상절 經濟六典元集詳節》·《속집상절 續集詳節》을 수찬하여 통치체제를 정비하였고, 《선원록 璿源錄》을 정비하여 비태조계를 왕위계승에서 제외시켰으며, 법전의 조종성헌존중주의(祖宗成憲尊重主義)를 확립하였다. 또한, 백관녹과를 정비하고, 호구법을 제정하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와 인구를 파악하였다.

그뒤 1418년 무절제와 방탕한 생활을 한 사실을 들어 장자인 세자 제(褆)를 폐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뒤의 세종)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선위하였다. 그러나 선위한 뒤에도 군권에 참여하여 심정(沈$증01)·박습(朴習)의 옥을 치죄하였고, 병선 227척, 군사 1만7000여명으로 대마도를 공략하는 등 세종의 왕권에 기여하였다. 태종은 이성계를 보필하여 조선왕조 개창에 공헌하였고, 개국초에는 일시 불우하기도 하였으나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국권을 장악하였으며, 정종을 계위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을 이룩함으로써 세종성세의 토대를 닦았다. 1418년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의 존호를 받고, 1421년에는 성덕신공태상왕으로 가봉(加封)되었다. 이듬해에는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의 시호를 받았고, 1683년(숙종 9)에 예철성렬(睿哲成烈)의 호를 더하였으며 명나라로부터 공정(恭定)의 시호를 받았다. 슬하에 12남 17녀를 두었는데, 제1자는 양녕대군(讓寧君大)이고, 제3자가 세종이다. 묘호(廟號)는 태종이며, 능호는 헌릉(獻陵)으로 광주(廣州) 대모산(大母山:현재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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