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中宗)

1488(성종 19)∼1544(중종 39).
조선 제11대왕.
재위 1506∼1544.
이름은 역(懌).
자는 낙천(樂天).


1. 가계


성종의 둘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이며, 비(妃)는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다. 제1계비(第一繼妃)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고, 제2계비는 영돈녕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1494년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하여졌다.



2. 왕도정치의 개혁


1506년 9월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이 반정(反正)을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낸 뒤 왕으로 추대되었다. 중종은 연산군 때의 여러가지 폐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하여 홍문관을 강화하는 동시에 문신의 월과(月課)·춘추과시(春秋課試)·사가독서(賜暇讀書)·전경(專經) 등을 엄중히 시행하며 문벌세가를 누르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1515년 신진사류인 조광조(趙光祖)를 등용하여 우익으로 삼고, 그가 주장하는 도학(道學)에 근거한 철인군주정치(哲人君主政治)를 표방하여 기성사류인 훈구파를 견제하는 동시에, 유교주의적 도덕규범인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현량과(賢良科)를 두어 친히 김식(金湜) 등 유능한 신진사류 28명을 뽑아 언론·문필의 중요직에 등용하여, 이른바 이들 사림파(士林派)를 중심으로 한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이상정치를 행하려 하였다.



3. 세력간의 갈등


그러나 이들 신진사림세력의 과격하고 지나친 개혁정치는 기성훈구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중종 자신도 조광조 등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중종의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반정공신의 위훈삭제문제(僞勳削除問題)를 계기로 1519년 조광조 등이 당파를 조직하여 나라를 뒤집어놓았다고 주장하여 이른바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신진사림세력이 숙청됨으로써 개혁정치의 기운이 서서히 사라지고, 심정 등 훈구파의 전횡이 자행되면서 중종대는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었으며 각종 옥사 등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심정·남곤의 당인 송사련(宋祀連)의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安處謙) 등의 사림파가 다시 숙청되었다. 1524년 심정·남곤 등에게 쫓겨났다가 기묘사화 이후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던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파직되고, 이듬해 3월에는 윤세창(尹世昌) 등의 모역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1527년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심정·유자광(柳子光)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동궁의 작서(灼鼠)의 변이 일어나 애매한 경빈박씨(敬嬪朴氏)와 복성군(福城君)이 쫓겨나 원사(怨死)하는 등 훈구파 상호간의 정권쟁탈전이 극심하게 벌어져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다.


1531년 그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안로가 다시 집권하게 되자 정계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이에 대립하여 중종의 외척인 윤원로(尹元老) 형제가 등장하여 정계는 훈신과 척신 사이의 대립으로 발전하여 김안로가 추방되었으며, 이러한 척신의 대두는 마침내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의 전주를 이루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중종대는 정치적으로 조선 전기사회가 후기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시기로, 각종 모순이 일시에 쏟아져나와 훈구세력과 신진사림세력의 갈등, 훈구세력 상호간의 갈등 및 훈구세력과 척신세력간의 세력다툼 등이 일어났다.



4. 국방의 혼란


이러한 정국의 불안은 국방정책에 있어서도 많은 혼란을 가져와 남왜북로(南倭北虜)에 시달렸다. 1510년 4월에 삼포의 항거왜추(恒居倭酋)가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켜 한때 제포(薺浦)와 부산포(富山浦)를 함락시키고 웅천(熊川)을 공격하는 등의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일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난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으나, 일본의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의 간청에 의하여 1512년 임신약조를 체결하고, 종래 쓰시마에서 파견하던 세견선(歲遣船)과 조선정부에서 하사하던 세사미두(歲賜米豆)를 반감하는 동시에 항거왜의 삼포거주를 엄금하고 제포 하나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의 내왕을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규제정책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국의 혼란이 계속됨으로써 왜변이 자주 일어났다. 즉, 1522년 5월 추자도왜변(楸子島倭變)과 동래염장(東萊鹽場)의 왜변, 1525년 9월 전라도왜변 등이 빈발하고, 중종 말년인 1544년 4월에는 왜선 20여척이 경상도 사량진(蛇梁鎭)에 침입하여 인마(人馬)를 약탈하자 조정에서는 기왕의 임신약조를 파기하고 왜인의 내왕을 금지하였다. 한편, 북방 국경지대의 야인(野人)의 침구도 빈번하여졌다. 1512년 야인이 갑산(甲山)·창성(昌城) 등지에 침입하여 인마를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여러 차례의 침입이 있었다.



5. 국방체제의 정비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여연(閭延)·무창(茂昌) 등 4군(四郡) 지대에 거주하는 야인의 퇴거를 권유하고, 6진(六鎭) 지대에는 순변사(巡邊使)를 파견하는 동시에 의주산성(義州山城)을 수축하여 북방방어에 노력하였으며, 1524년에는 압록강 유역의 야인을 적극적으로 축출하였다. 그러나 그뒤에도 야인들은 생활여건이 나은 6진·4군지대로 부단히 침입하여 들어와 때로는 만포첨사(滿浦僉使)가 피살되는 등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와같이 남왜북로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자 왕권호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정로위(定虜衛)를 설치하였으며,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였다.


특히 비변사는 처음 변방을 지키기 위하여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들이 모여 변방에 외침이 있을 때 이의 방어에 대한 의논을 하던 임시 합좌회의기관이었다. 그러나 뒤에 영설(永設) 합좌기관으로 발전하여 군사적 기능뿐만 아니라 정치기관화되었다. 이밖에도 한때 무학(武學)을 설치하였으며, 또한 편조전(鞭條箭)·벽력포(霹靂砲) 등을 제작하여 외침에 대비하는 등 국방력강화에 노력하였으나, 정치적 불안과 함께 국내의 군사질서가 허물어져 방군수포(放軍收布) 등이 행하여지는 등 후기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의 모순들이 노출되었다.



6. 사회·법률제도의 확립


사회면에서는 유교주의적 도덕윤리가 정착되어갔다. 조광조 등을 등용하였던 초기에는 미신을 타파하기 위하여 도교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昭格署)를 폐지하는 동시에 불교의 도승제도(度僧制度)를 폐지하였으며, 도성 안의 요승(妖僧)·무가(巫家)를 적발, 처치하고 새로이 절을 짓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를 취하면서 유교주의적 향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향약을 전국화하였다. 한때 조광조 일파의 몰락으로 주춤하기는 하였으나, 그뒤 유교주의화 정책은 더욱 추진되어 《소학》·《이륜행실 二倫行實》·《속삼강행실 續三綱行實》 등을 간행하여 국민교화에 힘쓰고, 말년에는 안향(安珦)을 모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또한 중국사신을 맞기 위한 영은문(迎恩門)을 세우는 등 유교주의적 도덕윤리가 정착되어갔다.


그리고 오랜 재위기간 동안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많은 편찬사업도 진행되었다. 1516년에는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여 많은 동활자를 주조하여 인쇄술 발달에 기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당시 사회에 긴요하게 요청되던 각종 서책이 편찬, 간행되었다. 즉, 최세진(崔世珍)·신용개(申用漑)·이행(李荇) 등을 중심으로 《사성통해 四聲通解》·《속동문선 續東文選》·《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 간행되었으며, 1536년 찬집청(撰輯廳)을 설치하여 권선징악을 중심주제로 한 서적들을 찬수 또는 번역하기도 하여 역사·지리·언어·문학·사회의 각 방면의 문헌들이 편찬, 간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국대전》·《대전속록》 등을 인간하고, 1540년 역대의 실록을 등사하여 사고(史庫)에 배치하는 동시에 1542년 근정청(斤正廳)을 설치하여 《대전속록》 이후 새로 반포된 법령을 모아 이듬해 7월 《대전후속록 大典後續錄》을 완성, 반포하여 법률제도의 확립을 꾀하기도 하였다.



7. 경제 및 농업·기술의 발달


경제면에 있어서는 저화(楮貨)와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였으며, 1522년 2월에는 악포금단절목(惡布禁斷節目)을 반포하여 악포의 유통을 막고, 두승(斗升)을 새로 만들어 도량형의 일원화를 꾀하였다. 한편 1524년에는 전라도·강원도·평안도에 양전(量田)을 실시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의복·음식·혼인 등에 대한 사치를 금지하였으며, 관리들의 신래자(新來者)에 대한 침학을 금지하는 등 경제 재건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혼란과 잦은 외침 등으로 실효를 크게 거둘 수가 없었다. 특히 중종 때의 특기할 사실은 1530년 4월에 당시 들어오기 시작하였던 서양의 세면포(細綿布)를 상의원(尙衣院)으로 하여금 무역할 수 있게 한 것으로, 이는 지배층의 의생활에 변화를 일으켰다.

또한, 농업과 관계된 과학기술도 발달하였다. 즉 관천기목륜(觀天器目輪)·간의혼상(簡儀渾象)을 새로 만들어 비치하고, 1534년 2월 명나라에 기술자를 파견하여 이두석(泥豆錫)·정청(汀靑)의 조작법과 훈금술(燻金術)을 습득해오게 하였으며, 1536년 창덕궁 안에 보루각(報漏閣)을 설치하여 누각(漏刻)에 관한 일을 보게 하였다. 또한 1538년에는 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관한 새로운 서적을 명나라에서 구입하여 연구개발에 힘쓰게 하였다. 1544년 11월 14일 세자인 인종에게 양위하고, 15일 창경궁의 환경전(歡慶殿)에서 재위 39년 만에 죽었다. 능은 처음 고양(高陽)으로 하였다가 1562년(명종 17) 광주(廣州)로 이장하고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세 왕비와 빈(嬪)에게서 인종·명종을 비롯하여 9남11녀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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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燕山君)


1476(성종 7)∼1506(중종 1).
조선의 제10대 왕.
재위 1494∼1506.
전주이씨(全州李氏).
휘는 융(㦕)

성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견 또는 尹起畝)의 딸로 폐비 윤씨이다.



1. 가계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뒤에 11대왕이 된 중종이 있었으나, 1483년(성종 14)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에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그의 무도함을 알면서도 그냥 세자로 삼았다 한다. 그리하여 1494년 12월에 성종의 승하와 함께 왕위에 올랐는데, 재위 12년 동안 너무도 무도한 짓을 많이 하였으므로 폐위, 교동(喬桐)에 안치되어 있다가 그해 11월에 죽었다.



2. 폐정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두 사람의 폐주 (廢主) 가운데 한 사람이며, 따라서 《선원계보 璿源系譜》에도 묘호와 능호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재위기간의 실록 역시 《연산군일기》로 통칭된다. 실록 첫머리에 있는 사평(史評)도 그의 일기에서는 “……만년에는 더욱 황음하고 패악(悖惡)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포락 (炮烙:단근질 하기)·착흉(斮胸:가슴 빠개기)·촌참(寸斬:토막토막 자르기)·쇄골표풍(碎骨瓢風: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형벌까지 있어서……” 운운하는 말로 되어 있을 만큼 그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폭군이었다.

같은 폐주라 하더라도 광해군에 대해서는 사고(史庫)의 정비라든가 성지(城池)·병고(兵庫)의 수리, 또는 대륙정책에 있어서의 현명하였던 외교정책 등을 들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수도 있지만, 연산군은 이러한 긍정적 요소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왜인과 야인의 입구(入寇)를 의식한 끝에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였다든가, 또는 변경지방에로의 사민(徙民)의 독려, 기타 《국조보감 國朝寶鑑》·《여지승람 輿地勝覽》 등의 수정 등 치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무도하기 이를 데 없던 폐정(弊政)에 비긴다면 보잘 것 없는 일인 것이다.



3. 사화


그런데 즉위초에는 아직 전조(前朝)의 치평 기운이 남아 있고 또 인재와 사림이 성한 가운데 어느 정도의 질서는 유지되고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4년째부터는 드디어 패악한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 5∼6년 동안에 두 차례나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류(士類)를 희생시키는 참극을 벌였다.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와 1504년의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이 두 사화는 물론 당대 정계의 난맥상 속에서 생겨났던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연산군 개인의 성품이 많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에도 문제는 있었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 편찬 때 그 사초 중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됨으로써, 이에 관련되었던 사림학자들이 많이 참화를 당하였던 사건이다.

그러나 이때 그렇게 많은 사류들을 희생시키게 되었던 것은, 본래 학자들을 싫어하는 연산군의 성품을 이극돈 (李克墩) 등 훈구 재상들이 교묘히 이용, 그들의 정쟁에 이용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갑자사화도 결국은 연산군의 사치와 향략 때문에 그토록 큰 옥사가 벌어졌던 것이라는 측면이 더 큰 비중을 가진다. 즉, 그의 방탕한 생활에서 오는 재정난을 메우기 위하여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그들은 왕의 이러한 횡포를 억제하려 하였고, 그리하여 여기에 또 한번의 사화가 벌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화의 직접적인 구실은 물론 생모 윤씨의 폐비사건으로 소급이 되지만, 이 역시 그의 포학한 성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어쨌든 이 두 사화의 양상은 모두가 참혹을 극했던 것으로서, 김종직의 경우는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고, 폐비 당시의 두 숙의(淑儀)는 타살을 하였으며, 할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도 구타, 치사하게 하였고, 기타 윤필상 (尹弼商)·김굉필(金宏弼) 등의 사형을 필두로, 한명회(韓明澮)·정여창 (鄭汝昌)도 모두 부관참시를 당하는 등, 패륜과 무도함을 극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4. 폐정의 원인


학자에 따라서는 그가 그토록 광포하고 난잡스런 성품을 가지게 된 동기를 주로 생모를 잃었던 사실에서 찾으려는 경향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비교적 체통을 유지하고 있는 실록 《연산군일기》에서도, 그는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능력도 없던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정계와 연산군과의 사이에는 부지불식간에 갈등이 일어났고, 여기서 그는 문신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게 여긴 끝에 경연과 사간원·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을 하였으며, 기타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도 모두 중단시켜버렸다.

당시로서는 가장 패륜스러운 일로 생각되던, 이른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는 단상제(短喪制)를 단행한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도 마굿간으로 바꾸며, 민간의 국문투서사건을 계기로 한글의 사용을 엄금한 일이 있고, 기타 이러한 조치들과 관련되었던 이야기들이 무수히 많다.



5. 중종반정


어쨌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심은 소란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1506년(연산군 12) 9월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 등의 주동으로 연산군폐출운동이 일어남과 함께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옹립되니 이것이 곧 중종반정이었다. 묘는 양주군 해등촌(海等村: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데, ‘연산군지묘’라는 석물 이외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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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


1457년(세조 3)∼1494(성종 25).
조선왕조 제9대왕.
재위 1469∼1494.
이름은 혈(娎).



1. 가계와 인품


세조의 손자이고, 덕종(德宗:세조의 長子로 追尊)의 둘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영의정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이고, 비(妃)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 공혜왕후(恭惠王后), 계비(繼妃)는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1461년(세조 7)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가 1468년 잘산군(乽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못되어 덕종이 죽자 세조가 궁중에서 키웠는데, 천품(天稟)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넓고 사예(射藝)와 서화(書畵)에도 능하여 특히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 어느날 뇌우(雷雨)가 몰아쳐 옆에 있던 환관(宦官)이 벼락을 맞아 죽자 모두 정신을 잃었으나, 그의 얼굴빛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 세조는 그가 태조를 닮았다고 하였다.

1469년(예종 1)에 예종이 죽고 그 아들이 아직 어리자, 정희대비(貞熹大妃:世祖妃)가 한명회·신숙주(申叔舟) 등 대신들과 의논하여 형 월산군(月山君)의 몸이 허약하므로 그를 왕위에 계승하게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13세에 불과하였으므로 그뒤 7년간 정희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다가 1476년(성종 7)에 비로소 친정(親政)을 실시하였다.



2. 친정초기


즉위하던 해 명나라 헌제(憲帝)의 고명(誥命)을 받았고, 세조찬위의 전철을 우려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난 평정 이후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하고 명성이 내외에 자자한 구성군 준(龜城君浚)을 유배시켰다.

1474년에 덕종을 회간왕(懷簡王)으로 추봉하였고, 1476년 공혜왕후가 아들이 없이 죽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의 딸 숙의 윤씨(淑儀尹氏)를 왕비로 삼았다. 그러나 계비가 된 윤씨는 원자(뒤의 燕山君)를 낳고 왕의 총애가 두터워짐에 따라 여러 다른 빈을 투기할 뿐 아니라 왕에게까지 불손하므로, 1479년 윤씨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이어서 1482년에는 사사(賜死)하였는데, 이는 뒤에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3. 법전편찬 관수관급제


고려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100여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교지·조례·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하여오던 《경국대전》을 수차의 개정 끝에 1485년에 완성, 반포하였다. 이어 1492년에는 이극증(李克增)·어세겸(魚世謙) 등에 명하여 《대전속록 大典續錄》을 완성하여 통치의 전거(典據)가 되는 법제를 완비하였다.

1470년에는 세조 때부터의 직전제(職田制)실시에 따른 토지의 세습과 겸병(兼倂) 및 관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여, 국가에서 경작자로부터 직접 조(租)를 받아들여 관리들에게 현물 녹봉을 지급하였다. 1490년에는 여주의 영릉(英陵:世宗의 능)을 참배, 왕래하는 연로(沿路)군현의 조세를 반감해주었고, 수령과 변장 임명시에는 친히 인견(引見)하여 지방민의 통치에 심혈을 기울일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백성들의 원고(怨苦)를 고려하여 형벌을 가볍게 하고, 장리(贓吏)의 자손은 등용하지 않는 국초 이래의 규정을 완화하였다.



4. 풍속과 교화


1485년 풍속을 교화하기 위하여 조신(朝臣)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가녀(再嫁女)의 자손은 관리등용을 제한하는 법을 공포하였으며, 형제숙질 사이에 다투는 자는 변방으로 쫓아내도록 하였다.

1487년에는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는 한편,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으며, 세조 때의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勳舊勢力)을 견제하기 위하여 근왕세력(勤王勢力)으로 김종직(金宗直)일파의 신진사림세력(新進士林勢力)을 많이 등용하여 훈신과 사림간의 세력균형을 이룩, 왕권을 안정시켰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5. 유교장려


불교를 배척하여 1489년 향시(鄕試)에서 사불양재(祀佛禳災)하여야 한다는 답안을 쓴 유생을 귀양보내도록 명령한 바 있으며, 1492년에는 도승법(度僧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다. 경사(經史)에 밝고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어 경연(經筵)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을 하는 한편,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였다.

1475년에는 성균관에 존경각(尊經閣)을 짓고 경적을 소장하게 하였으며, 양현고(養賢庫)를 충실히 하여 학문연구를 후원하고, 1484년과 1489년 두 차례에 걸쳐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學田)과 서적을 나누어주어 관학(官學)을 진흥시켰다. 또한 홍문관을 확충하고 용산두모포(龍山豆毛浦)에 독서당(讀書堂, 일명 湖堂)을 설치하여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고 독서제술(讀書製述)에 전념하게 하였다.



6. 문운진흥과 국방


또 편찬사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노사신(盧思愼) 등의 《동국여지승람》, 서거정(徐居正) 등의 《동국통감》과 《삼국사절요》·《동문선》, 강희맹(姜希孟) 등의 《오례의》, 성현(成俔) 등의 《악학궤범》 등 각종 서적을 간행하게 하여 문운을 진흥시켰다. 한편 국방대책에도 힘을 기울여 1479년 좌의정 윤필상(尹弼商)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建州野人)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함경도관찰사 허종(許倧)을 도원수로 삼아 2만4천의 군사로 두만강을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게 하여 국초부터 빈번히 침입하는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이렇게 하여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시켰으니 그의 묘호(廟號)가 후일 성종으로 정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평의 난숙에 따라 퇴폐의 풍이 한쪽에서 싹트고 왕 자신도 유흥에 빠지는가 하면 회뢰(賄賂)가 성행하였으며, 규방(閨房)의 일로 물의를 일으켜 폐비 윤씨사건은 급기야 정쟁의 불씨를 불러 일으키게까지 하였다. 그는 세 왕비와 여덟 후궁에게서 아들 19인과 딸 11인을 낳았는데, 제10대왕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며 제11대 중종이 된 진성대군 역(晉城大君懌)은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이었다. 능은 선릉(宣陵)으로 광주(廣州)에 있었는데 현재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과 함께 있다. 시호는 강정(康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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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왕후(元和王后)
간략정보
시대 고려
생몰년 미상
시호 원화(元和)
활동분야 왕비
원화왕후(元和王后)에 대하여
원화왕후(元和王后)
생몰년 미상. 고려 제8대왕 현종의 제2비.
고려 제6대왕인 성종의 딸이며, 어머니는 성종의 제3비 연창궁부인 최씨(延昌宮夫人崔氏)이다. 모후의 성을 따라 최씨라 하였다. 처음에는 항춘전(恒春殿)왕비라 하다가 뒤에 상춘전(常春殿)으로 고쳐 불렀다.
1010년(현종 1)에 거란의 침입이 있자 왕과 함께 나주까지 피난하였으며 적병이 물러난 뒤 왕궁으로 귀환하였다. 현종과의 사이에 효정(孝靜)과 천수전주(天壽殿主)의 두 공주를 두었다. 시호는 원화(元和)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鄭容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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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왕후(元貞王后)
간략정보
시대 고려
생몰년 ?-1018(현종9)
시호 원정(元貞)/ 의혜(懿惠)
활동분야 왕비
원정왕후(元貞王后)에 대하여
원정왕후(元貞王后)
?∼1018(현종 9). 고려 현종의 제1비.
고려 제6대왕인 성종의 딸이며, 어머니는 성종의 제2비 문화왕후 김씨(文和王后金氏)이다. 모후의 성을 따라 김씨(金氏)로 하였다.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하여 비를 삼고 현덕왕후(玄德王后)라 하였다.
1010년 거란이 침입해오자 임신한 몸으로 먼 길을 가기는 힘들다 하여 외가가 있는 선산으로 행하였고, 왕은 나주로 피난하였다. 거란이 물러간 뒤 왕궁으로 귀환하였다. 화릉(和陵)에 장사하였으며, 시호는 원정(元貞)이다.
1027년 의혜(懿惠)의 시호가 다시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鄭容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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