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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삼국 전체를 자기의 영토로 삼으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리하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새로운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문무왕이 옛 백제땅인 금마저에 안승을 맞아들인 것도 고구려부흥운동과 연결하여 당나라 및 당나라와 결탁한 웅진도독 부여 융의 백제군에 대항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한편, 문무왕은 670년 품일(品日), 문충(文忠) 등이 이끄는 신라군으로 하여금 63성을 공취하여 그곳의 인민을 신라의 내지로 옮기고, 천존(天存) 등은 7성을, 군관(軍官) 등은 12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671년 죽지(竹旨) 등이 가림성(加林城:지금의 林川)을 거쳐 석성(石城:지금의 林川 동쪽)전투에서 당군 3천5백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당나라의 행군총관(行軍摠管) 설인귀(薛仁貴)가 신라를 나무라는 글을 보내오자 문무왕은 이에 대하여 신라의 행동이 정당함을 주장하는 글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사비성(泗#비41城:지금의 扶餘)을 함락시키고 여기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여 아찬(阿飡) 진왕(眞王)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백제 고지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해 바다에서는 당나라의 운송선 70여척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에서도 신라와 당나라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특히, 신라가 백제의 고지를 완전히 점령한 뒤에 침략해온 당군과 전투가 가장 치열하였다. 문무왕 672년 이래로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군을 동원하여 침략해옴으로써 신라는 한강으로부터 대동강에 이르는 각지에서 당군과 여러 차례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나라는 674년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 대총관(鷄林道 大摠管)으로 삼아 침략해옴과 동시에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일방적으로 신라왕(新羅王)에 봉하여 문무왕에 대한 불신의 뜻을 보이기도 하였다.
신라의 당나라에 대한 항쟁은 675년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해에 설인귀는 당나라에 숙위하고 있던 풍훈(風訓)을 안내자로 삼아 쳐들어왔으나 신라장군 문훈(文訓)은 이를 격파하여 1천4백명을 죽이고 병선 40척, 전마 1천필을 얻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이근행(李謹行)이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오므로 신라군은 매초성(買肖城:지금의 楊州)에서 크게 격파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이 매초성의 승리는 북쪽 육로를 통한 당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편, 676년 해로로 계속 남하하던 설인귀의 군대를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지벌포(伎伐浦)에서 격파함으로써 신라는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당나라는 결국 676년 안동도호부를 평양으로부터 요동성(遼東城:지금의 遼陽)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는 많은 한계성을 지니는 것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무왕은 이와같이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과정에서도 국가체제의 정비를 위하여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증가한 중앙관부(中央官府)의 업무와 확장된 영역의 통치를 위하여 불가피한 조처였던 것이다.
우선,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 잡찬(#잡19飡) 문왕(文王)을 비롯한 문훈, 진복(眞福), 지경(智鏡), 예원(禮元), 천광(天光), 춘장(春長), 천존 등 8명의 인물이 행정책임자로서 집사부 중시(中侍)를 역임하였다.
문무왕은 이 중에서 특히 문왕, 지경, 예원과 같은 자신의 형제들을 중시에 임명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통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무왕은 671년과 672년에 걸쳐 병부(兵部), 창부(倉部), 예부(禮部), 사정부(司正府)와 같은 중앙관부의 말단행정 담당자인 사(史)의 인원수를 증가시켜 업무처리를 원활하게 하였다.
지방통치를 위해서는 673년 진흥왕대에 이미 소경(小京)을 설치한 중원(中原)에 성을 축조하였으며, 통일한 후인 678년 북원소경(北原小京)을, 680년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어 왕경(王京)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고 신문왕대에 완성되는 5소경제(小京制)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삼국통일 후의 신라군사조직은 신라민과 피정복민으로 구성된 중앙의 9서당(誓幢)과 지방의 9주에 설치된 10정(停)이었다. 여기에서 9서당은 대체로 신문왕대에 완성되는 것이지만 9서당 중에서 백금서당(白衿誓幢)은 문무왕이 백제지역을 온전히 점령한 다음해인 672년에 백제민을 중심으로 조직한 것이다.
또, 같은해 장창당(長槍幢)을 두었는데 이것은 693년에 비금서당(緋衿誓幢)이 되었다. 이로써 보면 9서당 편제의 기초는 이미 문무왕대에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밖에 문무왕 672년 기병을 위주로 하는 지방군제의 하나인 5주서(州誓)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문무왕의 체제정비작업은 675년 백사(百司)와 주군(州郡)의 동인(銅印)을 제작, 반포한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시호는 문무(文武)이며, 장지는 경상북도 경주군 감포(甘浦) 앞바다에 있는 해중왕릉(海中王陵)인 대왕암(大王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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