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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7/05/12 조선 제 18대왕 현종
한국역사/조선 2008/05/08 16:35 by 美
순종(純宗)


1874(고종 11)∼1926.
조선왕조 마지막 제27대왕.
재위 1907∼1910.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척(拓),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1874년 2월 창덕궁의 관물헌(觀物軒)에서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 閔妃)의 둘째아들로 탄생하였다. 탄생 다음해 2월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82년(고종 19)에 민씨(閔氏, 뒷날의 純明孝皇后)를 세자빈으로 맞았다. 1897년 대한제국의 수립에 따라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4년 새로이 윤씨(尹氏)를 황태자비로 맞이하였다. 1907년 7월에 일제의 강요와 일부 친일정객의 매국행위로 왕위를 물러나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고,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황제(皇弟)인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로 책립하였고, 그때까지 거처하던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4년간에 걸친 순종의 재위기간은 침략자 일본에 의한 한반도 무력강점공작에 의하여 국권이 점차적으로 제약되고, 마침내 송병준(宋秉畯)·이완용(李完用) 등 친일매국정객과 일본침략자의 야합으로 조선왕조 519년의 역사에 종언을 고하게 되는 경국(傾國)의 비사(悲史)와 민족사의 주권을 수호하려는 저항의 통사(痛史)의 시기였다. 순종이 즉위한 직후인 1907년 7월 일제는 이른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丁未七條約)을 강제로 성립시켜 국정 전반을 일본인 통감이 간섭할 수 있게 하였고, 정부 각부의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는 이른바 차관정치를 시작하였다.

내정간섭권을 탈취한 일본은 동시에 얼마 남지 않았던 한국군대를 재정부족이라는 구실로 강제해산시켜 우리 겨레의 손에서 총·칼의 자위조직마저 해체해 버렸다. 또한 1909년 7월에는 기유각서에 의하여 사법권마저 강탈해버렸다. 이처럼 순종을 허위(虛位)의 황제로 만들어버린 이토(伊藤博文)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 소네(曾彌荒助)를 거쳐 군부출신의 데라우치(寺內正毅)가 조선통감으로 부임해 온 뒤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숨통을 끊고자 더욱 거센 공작을 펴게 되었다. 일제는 1909년 7월 각의(閣議)에서 ‘한일합병 실행에 관한 방침’을 통과시킨 뒤 한국과 만주문제를 러시아와 사전협상하기 위하여 이토를 만주에 파견하였다. 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安重根)에 의하여 포살되자 이를 기화로 한반도 무력강점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일제는 이러한 침략에 부화뇌동하는 친일매국노 이완용·송병준·이용구(李容九) 등을 중심한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앞세워 조선인의 원에 의하여 조선을 합병한다는 미명하에 위협과 매수로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고 한반도를 무력강점해버렸다.

야만적인 침략행위에 우리 겨레는 순종즉위 전부터 의병투쟁으로 대항하는 한편, 개인적인 의거로 맞섰으며, 또한 민족의 저력을 키워 일제와 대항하여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강경과 온건의 민족저항의 역량이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고, 일부 친일매국노의 암약으로 나라를 그르치게 되었던 것이다. 순종 주변에는 친일매국대신과 친일내통분자만이 들끓는 가운데, 국가최고의 수렴자로서의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한이 남았다. 일제는 무력을 배경으로 원색적인 침략수단을 다하였고, 교묘하게 이들 친일매국세력을 조종하여 민족의 저항역량을 저해하였던 것이다.

대한제국이 일제의 무력 앞에 종언을 고한 뒤, 순종은 황제의 위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 이왕(昌德宮李王)으로 예우하는 조처가 취해졌고, 왕위의 허호(虛號)는 세습되도록 조처되었다. 폐위된 순종은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었다. 1926년 4월 25일에 죽고 6월에 국장을 치러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의 유릉(裕陵)에 안장되었다. 순종의 인산례(因山禮)를 기하여 6·10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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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조선 2008/05/08 16:33 by 美

고종(高宗)

1852(철종 3)∼1919.
조선 제26대왕.
재위 1864∼1907.
본관은 전주(全州).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 후에 형(㷗)으로 개명, 자는 성임(聖臨), 후에 명부(明夫)로 개자(改字)하였다. 호는 성헌(誠軒).



1. 가계·왕위계승 시말


영조의 현손(玄孫)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閔氏)이다. 1852년 음력 7월 25일 정선방(貞善坊)소재의 흥선군 사제에서 출생하였다. 즉위 후인 1866년 9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이가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고종이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의 뒤를 이어 1863년 즉위하게 된 것은 아버지 흥선군과 익종비(翼宗妃) 조대비(趙大妃)와의 묵계에 의해서였다. 순종·헌종·철종 3대에 걸쳐 세도정치를 한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철종의 후사가 없자 뒤를 이을 국왕 후보를 두고 왕손들을 지극히 경계하였다. 이때 안동김씨 세도의 화(禍)를 피하여 시정(市井)무뢰한과 어울리고 방탕한 생활을 자행하며 위험을 피하던 이하응은 조성하(趙成夏)를 통하여 궁중 최고의 어른인 조대비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재빨리 흥선군의 둘째아들 명복으로 하여금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여 그를 익성군(翼成君)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하여 국왕에 즉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높여 국정을 총람, 대섭하게 하였다. 고종은 장성하매 친정(親政)의 의욕을 가지고 차차 흥선대원군과 대립하게 되었고, 이 뜻을 헤아린 민비와 노대신들은 유림을 앞세워 대원군 하야공세를 폈다. 1873년 마침내 서무친재(庶務親裁)의 명을 내려 흥선대원군에게 주어졌던 성명(成命)을 환수하고 통치대권을 장악하였다.



2. 개화당과 수구세력간의 갈등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정권은 민비의 척족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민씨척족정권은 흥선대원군이 취하였던 강력한 척사양이정책(斥邪壤夷政策)과는 달리, 안으로 정계 일부에 자라고 있던 대외개방의 움직임과 밖으로 근대 일본의 국교요청(國交要請)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어 새로운 국교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계속하여 구미 열강과도 차례로 조약을 맺어 통교관계를 가지는 개항정책을 실행하였다. 고종과 민씨정권은 개항 후 일련의 개화시책을 추진하여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는 한편,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과 수신사(修信使)를 계속 파견하였다. 또한, 부산·원산·인천 등 각 항을 개항하고 개화문명을 수용하는 정책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개화시책을 틈타 일본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침투해오자, 국내에서는 개화와 수구의 정견을 달리하는 두 파의 대립이 점차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1881년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 朝鮮策略》의 유입, 반포를 계기로 위정척사파는 마침내 신사척사상소운동(辛巳斥邪上訴運動)을 일으켜 민씨정부규탄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때 안기영(安驥永) 등에 의하여 국왕의 이복형인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이재선(李載先)을 국왕으로 옹립하고자 하는 국왕폐립음모(國王廢立陰謀)가 꾸며졌으나, 고변(告變)에 의하여 사전에 적발되어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민씨정권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탄압하여 정국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변법(變法)에 의한 근대국가 건설을 추진하는 개화당과 기존 구체제의 유지를 고집하는 수구세력간의 알력으로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청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하니 자주권에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구식군대의 세력을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하였고,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궁중을 습격한 개화세력의 압력으로 고종은 그들에게 정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는 등 왕권은 큰 도전을 받았다. 임오군란 이후 친청화(親淸化)한 민씨정권은 계속 국정을 논단하면서도 급격한 동북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안으로는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였다.



3. 흥선대원군의 등장과 명성황후 시해사건


또 한편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문제를 둘러싸고 교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埈鎔) 등이 동학도와 내통하면서 고종을 시해할 음모를 꾸몄으나 고변하는 자가 있어 무위로 끝나 안전할 수 있었다. 갑오경장 초기 은퇴중이던 흥선대원군은 일부 개혁세력 추대를 받아들여 궁중에 들어가서 고종으로부터 정치적 실권을 위임받았다. 개혁주도세력과 일본공사 등은 흥선대원군의 직접간여를 꺼려 그의 실권은 거세한 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중심으로 갑오개혁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해 홍범14조(洪範十四條)를 제정하여 자주독립을 종묘에 서고(誓告)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이 진행되면서부터 노골적인 침략적 간섭과 이권탈취에 혈안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 고종은 점차 일본을 혐오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후 3국간섭으로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일본의 압력을 배제하고자 친로정책(親露政策)을 펴게 되었다. 이에 일본공사(日本公使:三浦梧樓)는 친일정객과 짜고 을미사변을 일으켜 왕궁을 습격, 민비를 살해하는 천인공노할 폭거를 자행하였다. 을미사변으로 고종은 왕비를 잃었으며, 일본의 압력으로 폐서인(廢庶人)조처까지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뒤 민씨 복위의 조서(詔書)를 내려 비의 전을 태원전(泰元殿)에 설치한 뒤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택되고, 비로소 홍릉(洪陵)에 국장되었다(1919년 金谷陵으로 옮김.).



4.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성립


이보다 앞서 1884년 러시아와 조러통상조약을 체결한 뒤 러시아가 적극적인 접촉을 벌여오자, 고종은 당시 갑신정변 직후에 벌어지고 있던 청·일 양국군의 서울 진주와 충돌 등에 자극받아 난국을 타개하고자 러시아와 비밀리에 밀약을 추구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밀사를 거듭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침투공작을 편 일이 있었다. 이러한 밀약공작은 안으로는 민씨정권과 밖으로는 청·일의 간섭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하여 군사적 압력과 정치적 간섭을 강화하자, 고종은 친일세력을 물리치고자 친러정객과 내통하고 1896년 2월 돌연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친러정부가 집정하면서 열강에게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국가의 권익과 위신이 추락하고 국권의 침해가 심하여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선양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종은 1897년 2월 환궁하였으며, 10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5. 을사조약 체결과 실권(失權)


1898년 7월 안경수(安駉壽)는 현역과 퇴역군인들을 동원한 황제양위를 음모하였다. 또, 9월에는 정계를 농락하다 유배된 김홍륙(金鴻陸)이 독다사건(毒茶事件)을 일으키는 등 고종 신상에 거듭 위험이 닥쳤으나 무사하였다. 그 무렵 독립협회 회원을 중심으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맹렬하게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보부상과 군대의 힘을 빌려 이를 진압하였다. 고종은 1900년 둘째아들을 의친왕(義親王), 셋째아들을 영친왕(英親王)에 봉하고, 1901년 순빈 엄씨(淳嬪嚴氏)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져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이 격렬해지는 가운데 장호익(張浩翼) 등이 황제폐립을 음모하였으나 무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군사적 압력하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제1차한일협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고,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마침내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고종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을사오적의 친일대신들에 의하여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대하여 고종은 미국에 조약의 무효를 호소하고자 하여, 1905년 11월 26일자로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청국 즈푸(芝罘)를 경유하여 전 미국공사이며 한국정부의 고문으로 있었던 헐버트(Hulbert)에게 밀서를 보내어 미국정부에 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미 필리핀에서 미국의 우월권을 인정받는 대신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는 가쓰라·태프트협정(桂·Taft協定)을 체결한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국정에 전반적으로 간여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고종은 마침내 한국문제를 국제정치의 마당에 호소하고자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이상설(李相卨:전 의정부참찬)·이준(李儁:전 평리원검사)·이위종(李瑋鐘:주러조선공사관서기관)을 파견하였다. 한편, 러시아황제 니콜라스 2세에게 친서를 보내어 이들 특사활동에 원조해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고종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완용(李完用)·송병준(宋秉畯) 등 일제에 아부하는 친일 매국대신들과 군사력을 동반한 일제의 강요로 한일협약 위배라는 책임을 지고 7월 20일 퇴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종의 뒤를 이어 순종이 즉위하였으며, 고종은 태황제(太皇帝)가 되었으나 실권이 없는 허위(虛位)였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정월에 사망하였다.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하였다는 풍문이 유포되어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인산례(因山禮)로 국장이 거행될 때 전국 각지에서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능은 홍릉(洪陵:金谷)이며, 저서로는 《주연집 珠淵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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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조선 2007/05/12 17:20 by 美

현종(顯宗)

1641(인조 19)∼1674(현종 15).
조선 제18대왕.
재위 1659∼1674.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연(棩). 자는 경직(景直).


1. 가계


효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며, 비는 영돈녕부사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효종이 봉림대군(鳳林大君)시절에 청나라의 볼모로 심양(瀋陽)에 있을 때 심관(瀋館)에서 출생하였으며, 1649년(인조 27)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1651년(효종 2)에 왕세자로 진봉(進封)되었다.


2. 치적


현종은 효종의 뒤를 이어서 1659년에 즉위하여 재위 15년 동안 대부분을 예론을 둘러싼 정쟁 속에서 지냈다고 볼 수 있지만, 1662년(현종 3) 호남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고, 1668년 동철활자(銅鐵活字)10여만자를 주조시켰으며,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천문관측과 역법(曆法)의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또, 지방관의 상피법(相避法)을 제정하기도 하였고, 동성통혼(同姓通婚)을 금지시켰다. 1666년에는 앞서 1653년에 제주도에 표류해 온 하멜(Hamel, H.) 등 8명이 전라도 좌수영을 탈출하여 억류생활 14년간의 이야기인 《화란선제주도난파기 和蘭船濟州島難破記―하멜표류기(漂流記)》와 그 부록인 〈조선국기 朝鮮國記〉를 저술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현종은 효종대에 염원되어 비밀리에 계획되었던 청나라에 대한 보복정벌인 북벌(北伐)을 국제관계와 국내사정으로 중단하는 대신 군비(軍備)에 힘써서 훈련별대(訓鍊別隊)를 창설하였다. 한편, 이미 망한 명나라에 대한 숭모(崇慕)의 경향이 현저해졌고, 이러한 숭명의 활동은 다음의 숙종 때부터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 예론의 갈등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기해복제문제(己亥服制問題)라는 예론에 부딪혔다. 즉, 효종의 상을 당하자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 조씨(慈懿大妃趙氏)의 복제문제가 정쟁화된 것이다. 당시 일반사회에서는 주자의 《가례 家禮》에 의한 사례(四禮)의 준칙이 지켜지고 있었지만, 왕가에서는 성종 때 제정된 《오례의 五禮儀》에 준칙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의 관계와 같은 사례가 없었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서 왕위에 있었다면 별문제가 없었지만 인조의 둘째아들로서 책립되었을 뿐더러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상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의 예로 3년상의 상복을 이미 입〔服〕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 어떠한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가 문제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서인측에서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주동이 되어 효종이 둘째 아들인만큼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였고, 남인측의 윤휴(尹鑴)와 허목(許穆) 등은 효종이 아무리 둘째 아들이라고 하여도 승통하였으므로 삼년상이 옳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 무렵 정치계는 1575년(선조 8) 동인에게 배척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정치계에 되돌아온 서인과 동인의 계열이기는 하지만 북인·남인으로 분파된 뒤 북인에게 배척되었다가 역시 인조 때부터 조정에 복귀한 남인과의 대립이 심상치 않았으나, 그래도 인조·효종 때는 그 관계에 감정적인 대립이 적어서 특히 학문적인 면에서는 서로의 교섭이 원활한 때였다. 그렇지만 예론이라는 당론의 극한적인 대립이 양극화되고 이로 인하여 피차의 논쟁이 장기화되자, 감정이 격화되어 서인측의 주장에 따라서 기년복이 조정에서 일단 결정되었다. 그렇지만 이른바 예론이 지방으로 번져 그 시비가 더욱 커지자, 1666년 조정에서 다시 기년복의 결정을 재확인하면서 이에 대하여 항의를 하게 되면 그 이유를 불문하고 엄벌에 처할 것을 포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74년 왕대비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문제가 재론되면서 예론이 또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즉, 서인측의 대공설(9개월복)과 남인측의 기년설이 대립하게 되었다. 그뒤 이 문제가 기년복으로 정착되면서 서인측의 주장이 좌절되었으므로 현종 초년에 벌어진 예론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이로써 서인측이 많이 배척되었다. 이 문제는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되어 1679년(숙종 5) 20년간에 걸친 기해복제문제의 재론을 엄금하는 엄명이 있어 형식적으로는 조정에서 다시 거론되지 않았지만, 이후에도 많은 시비가 내면적으로 계속되었다.


4. 예론의 후유증


이 예론은 예의 본질론(本質論―不可變性)에 입각한 서인측의 예관념(禮觀念)과 행용론(行用論―可變性)에 치중한 남인측의 예관념의 학문적인 해석이 당론으로 발전하면서 당쟁의 비극으로 까지 파급된 것이다. 이렇게 현종대는 예론의 시비로 일관되다시피 되었고, 당론의 쟁투로 지새웠기 때문에 현종이 죽은 뒤에 찬수된 《현종실록》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종실록》은 숙종 1년(1675)부터 편찬이 착수되었으나 여의치 못하다가 숙종의 독촉을 받고 1677년에 겨우 완성된 졸속의 실록이었고, 아울러 그 편찬에 현종 말년 이후 숙종 초년에 걸쳐서 득세한 남인측이 많이 참여하였기 때문에 서인측으로는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1680년 경신대출척을 계기로 서인이 다시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뒤 서인 중심의 실록개수청(實錄改修廳)을 설치하여 1683년에 28권의 《현종개수실록 顯宗改修實錄》이 완성되었다. 조선시대의 실록 가운데 수정실록(修正實錄)이 《선조실록》과 《경종실록》의 경우가 있고, 개수실록이 이 《현종실록》의 경우에 해당되는데 모두 당쟁의 결과 부득이 개수 또는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현종개수실록》의 성격과 당시의 당쟁상황을 짐작할만하다. 시호는 소휴(昭休), 능호는 숭릉(崇陵:경기도 구리시 소재)으로 비 명성왕후와 같이 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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