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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고려 2007/04/21 12:21 by 美
공양왕(恭讓王)

1345(충목왕 1)∼1394(태조 3)
고려 제34대왕
재위 1389∼1392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요(瑤). 신종의 7대손으로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국대비 왕씨(國大妃王氏)이다. 비는 창성군(昌成君) 진의 딸 순비 노씨(順妃盧氏)이다.

1389년 이성계(李成桂), 심덕부(沈德符) 등에 의하여 창왕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이성계일파의 압력과 간섭을 물리치지 못하고 우왕을 강릉에서, 창왕을 강화에서 각각 살해하였다.

재위 3년동안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쳐 몇 차례 제도를 개편했는데, 이것은 이성계 등 신진 사대부들이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선, 관제에 있어서 전리사(典理司), 판도사(版圖司), 예의사(禮儀司), 군부사(軍簿司), 전법사(典法司), 전공사(典工司) 등을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6조로 개편하고, 첨설직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개성의 오부와 동북면과 서북면의 부·주에 유학교수관을 두었으며, 과거시험에 무과를 신설하였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목적으로 주자가례를 시행하여 집집마다 가묘를 세우게 했고, 출가하여 승려가 된 이들을 찾아내어 본업에 복귀시켰다. 그리고 오교양종(五敎兩宗)의 불교계파를 없애 군대에 편입시킴과 동시에 절의 재산을 몰수하여 각 지방 관청에 소속시키는 조치도 취했다.

1390년 도선(道詵)의 비록(秘錄)에 의하여 한양으로 천도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源) 등으로 개성을 지키게 하고 백관을 분사(分司)하게 하였으나, 이듬해 민심의 동요로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경제면에 있어서는 1391년 광흥창(廣興倉), 풍저창(豊儲倉)을 서강(西江)에 세워 조운의 곡식을 비축하게 하였으며, 개성 오부에는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조준(趙浚)의 건의로 과전법을 실시하여 녹제와 전제를 개혁, 신흥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게 하였다.

또한, 인물추고도감(人物推考都監)을 두어 노비결송법을 정하였다. 1391년 이성계일파에 반대하던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정치무대는 이성계의 독무대가 되었다. 얼마없어 조준, 정도전, 남은 등에 의하여 이성계가 왕으로 추대됨으로써 공양왕은 폐위되고 고려왕조는 끝나고 말았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간성군(杆城郡)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고, 1394년 삼척부(三陟府)로 옮겨졌다가 살해되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에 있는 고릉(高陵)인데,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에도 공양왕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 불안했던 왕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이 건국된 후 태종 16년에 이르러 공양왕으로 추봉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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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고려 2007/04/21 12:19 by 美

창왕(昌王)

1380(우왕 6)∼1389(공양왕 1)
고려의 제33대왕
재위 1388∼1389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창(昌). 우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시중 이림(李琳)의 딸 근비(謹妃)이다.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부왕인 우왕이 강화로 추방되자 조민수(曺敏修)와 이색(李穡)의 추천으로 정비(定妃: 공민왕비)의 교(敎)를 받아 즉위하였는데, 그때 나이 9세였다.

1388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사헌부·판도사(版圖司)로 하여금 권문세가에 의하여 크게 무너진 토지제도를 바로잡는 방법을 의논하여 보고하게 하고, 공부(貢賦)의 법이 문란하여져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므로 모든 공물을 면하게 하여, 각 도의 원수(元帥)·도순문사(都巡問使)·안렴사(按廉使) 등이 군민(軍民)으로부터 사선(私膳)을 취하는 것을 금지시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죄주게 하고, 회뢰(賄賂)가 성행하는 것을 엄히 금지하게 하며, 형벌을 신중히 처리하게 하였다.

그해 수창궁(壽昌宮)의 ‘창(昌)’자가 왕의 이름과 같으므로 수령궁(壽寧宮)이라 고치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해 대사헌 조준(趙浚)이 토지제도가 고르지 못한 데에서 오는 여러가지 폐단을 들어 상소를 올렸고,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版圖判書)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典法判書) 조인옥(趙仁沃) 등도 사전(私田)의 폐단을 논하고 그 개혁을 청하였다.

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이행 등이 첨설직(添設職)을 군공(軍功)이외에는 그 임명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전선법(銓選法)을 복구하여 문무(文武)의 전주(銓注)는 이부와 병부에서 행하게 하였다.

또, 우상시(右常侍) 허응(許應)이 균전(均田)의 강행을 상소하였다. 전왕인 우왕을 강화에서 여흥군(驪興郡: 驪州郡)으로 옮겼으며, 최영(崔瑩)을 충주로 귀양보냈다가 죽였다. 이어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상서사(尙瑞司)를 두었으며, 또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였다.

또, 대사헌 조준이 상서하여 기인(其人)의 제도가 그들을 노예와 같이 사역하여 그 고통이 심하여 도망하는 자까지 있게 됨을 들어 그 시정을 청하였다.

또한, 전법판서 조인옥이 상소하여 사원(寺院)의 토지수입과 노비의 고용은 그 소재하는 관(官)에서 수납하여 승도(僧徒)의 수를 헤아려 지급하고, 인가(人家)에 유숙하는 중은 범간(犯奸)으로 논하며, 귀천(貴賤)의 부녀는 절에 가는 것을 금하여 위반하는 자는 실절(失節)로써 논하고, 부녀로서 중이 되는 자는 실행(失行)으로써 논하며, 향리(鄕吏)·역리(驛吏)·노비로서 중이 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1389년 1월 경상원수 박위가 병선 100척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또, 그해 사관(史官) 최견 등이 상소하여 사관 8명을 두되, 각각 사초(史草) 2부를 작성하여 관직을 옮길 때 1부는 춘추관에 제출하고 1부는 집에 보관하여 후일에 증거로 삼게 하고, 겸관(兼官)과 충수찬(充修撰) 이하는 견문록(見聞錄)에 의하여 각각 사초를 작성하여 춘추관에 보내며, 춘추관은 서울과 지방의 모든 관청에 통첩하여 그 베풀어 행한 바를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8월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 밀도(密度)가 옥지(玉之)를 사신으로 보내자 그를 후히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양광도도관찰사 성석린(成石璘)의 청으로 주·군에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같은해 전객령(典客令) 김윤후(金允厚) 등을 유구국에 보내어 보빙하였다. 그해 대사헌 조준 등이 상소하여 사전의 폐단을 논하고 경기(京畿)의 땅은 사대부에게 지급하고 그밖의 땅은 모두 공상(供上)과 제사의 용도에 충당하여 그것으로써 녹봉과 군수(軍需)의 비용을 충족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산기(散騎) 이상의 처로 명부(命婦)가 된 자는 재가를 금하고, 판사(判事, 정3품) 이하 6품까지의 처로서 남편이 죽은 자는 3년간 재가를 금하였다. 또, 그해 전왕인 우왕을 여흥군에서 강릉부로 옮겼다.

그뒤 이성계 등이 우왕과 창왕이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씨(辛氏)라 하여 두 왕을 모두 폐위시켰다가, 12월 우왕은 강릉에서, 창왕은 강화에서 각각 살해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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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고려 2007/04/21 12:16 by 美

우왕(禑王)

1365(공민왕 14)∼1389(공양왕 1)
고려의 제32대왕
재위 1374∼1388
본관은 개성

어릴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이며, 신돈(辛旽)의 시비(侍婢)인 반야(般若)의 소생으로 전해진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실각하자 당시 후사가 없던 공민왕이 근신(近臣)에게 자기가 전에 신돈의 집에 행차하여 그의 시비와 상관해서 아들을 낳은 바 있음을 밝힘으로써 공민왕의 아들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뒤 신돈이 주살된 직후에 궁중에 들어가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하여졌으며, 백문보(白文寶)·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를 사부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는 궁인 한씨(韓氏)의 소생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1374년에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인임(李仁任)·왕안덕(王安德) 등에 의해서 옹립되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초부터 북원(北元)이나 명나라와의 복잡한 외교문제가 계속 발생하였고, 더욱이 왜구의 침탈이 극심하여 매우 불안정한 정세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인임과 최영(崔瑩)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가운데 정사를 돌보지 않고 환관 또는 악소배(惡少輩)들과 사냥이나 유희를 일삼았다. 1388년(우왕 14)에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고하여 오자, 크게 분개하여 이성계(李成桂)의 반대를 물리치고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요동정벌이 실현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이성계에 의하여 최영이 실각함과 동시에 폐위되어 강화도로 안치되었다.

그뒤 여흥군(驪興郡: 지금의 驪州)으로 이치(移置) 되었다가 1389년(공양왕 1) 11월에 김저(金佇)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다시 옮겨졌으며, 다음달에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이성계 등은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 하여 우왕과 그 아들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고려사》에서도 우왕의 세가(世家)를 열전(列傳)의 반역전(叛逆傳)에 편입시켜 신우전(辛禑傳)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은 그 진위가 가려지지 않은 채, 이성계 등의 공양왕 옹립이나 조선건국을 합리화시키려는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李朝建國의 硏究(李相佰, 乙酉文化社, 1949)
恭愍王(金哲埈, 韓國의 人間像 1, 新丘文化社, 1965)
高麗禑王代의 政治權力의 性格과 그 推移(朴天植, 全北史學 4, 1980)
李仁任政權에 대한 一考察(高惠玲, 歷史學報 91,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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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고려 2007/04/21 12:13 by 美

공민왕(恭愍王)

1330(충숙왕 17)∼1374(공민왕 23)
고려 제31대왕
재위 1351∼1374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전, 초명은 기(祺), 몽고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호는 이재(怡齋), 익당(益堂).

충숙왕과 명덕태후 홍씨(明德太后洪氏)사이의 둘째아들이다. 비는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며, 그밖에 혜비이씨(惠妃李氏), 익비한씨(益妃韓氏), 정비안씨(定妃安氏), 신비염씨(愼妃廉氏)가 있다.

일찍이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하여졌으며, 1341년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하였으며, 1344년 충목왕 즉위년에 강릉부원대군에 봉하여졌다.

1349년 원나라에서 노국대장공주를 왕비로 맞이한 2년 뒤, 원나라가 나이 어리고 외척의 전횡으로 국정을 문란하게 한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그의 뒤를 잇게 함으로써, 공주와 함께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14세기 후반,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대륙정세의 변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려의 중흥을 꾀하여 많은 개혁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으로 원나라에 반대하는 정책을 펴 몽고적 잔재를 제거하고, 잃어버린 국토 회복을 위한 북진정책을 실시하였으며, 대내적으로는 고려왕실을 허약하게 만든 친원파를 제거하고, 국가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일곱 차례에 걸친 제도 개혁을 실시하였다.

즉, 원나라가 쇠퇴해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1352년 변발·몽고식 의복 등의 몽고풍속을 폐지하였으며, 1356년 몽고의 연호·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를 복구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하던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일파(奇轍一派)를 숙청하였으며, 100년간이나 존속해온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하고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였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遼東)에 남아 있는 원나라의 세력을 공략하였으며, 2년 뒤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 국위를 떨쳤다.

그리고 내정에 있어서는 1352년 그동안 인사행정에 폐단이 많았던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등의 개혁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홍건적 및 왜구의 잦은 침입과, 1363년 찬성사 김용(金鏞)의 반란, 1364년 충선왕의 셋째아들 덕흥군(德興君)옹립을 내세운 친원파 최유(崔濡)의 반란 등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왕은 실의에 빠져, 모든 국사를 신돈(辛旽)에게 맡기고 불공에만 전심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신돈은 실정을 거듭하고 왕을 해치려 하므로, 그를 수원으로 귀양보낸 뒤 처형하였다.

그뒤 1372년, 명문자제들로 구성된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고, 1373년 모니노(牟尼奴)에게 우(禑)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하였다.

그런데 자제위 소속 홍륜(洪倫)이 익비를 범하여 임신시키자, 그것을 은폐할 의도로 홍륜과 밀고자인 환관 최만생(崔萬生) 등을 죽이려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공민왕은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히기도 한다.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 天山大獵圖〉가 있다. 능은 현릉(玄陵)으로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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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고려 2007/04/21 12:12 by 美

충정왕(忠定王)

1337(충숙왕 복위 6)∼1352(공민왕 1)
고려 제30대왕
재위 1349∼1351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저(몽고명은 迷思監朶兒只). 충혜왕의 서자(庶子)이며, 어머니는 찬성(贊成) 윤계종(尹繼宗)의 딸인 희비윤씨(禧妃尹氏)이다.

1348년에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봉해졌다가 그해 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 이듬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강안전(康安殿)에서 즉위하였다. 그리고 어머니 희비의 부(府)를 세워서 경순(敬順)이라 하였다.

1350년에 왜구가 고성(固城)·죽림(竹林)·거제(巨濟) 등에 침입한 것을 합포(合浦:馬山)의 천호(千戶) 최선(崔禪) 등이 물리쳤는데, 이로부터 왜구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여 순천부(順天府)에 침입하여 조선(漕船)을 약탈하기도 하고 뒤이어 합포·장흥(長興)·동래(東萊) 등지에도 침입하였다.

그리하여 이권(李權)을 경상·전라도도지휘사(慶尙全羅道都指揮使), 유탁(柳濯)을 전라·양광도도순문사(全羅楊廣道都巡問使)로 삼아 왜구에 대비하게 하는 한편, 왜구의 피해에 대비하여 진도현(珍島縣)을 내지(內地)로 옮겼다. 한편, 안으로는 외척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 등이 횡포를 부려 정치를 문란하게 하였다.

또, 그해 운남왕(雲南王)이 사신을 보내왔다. 1351년에 왜구가 자연도(紫燕島:仁川)·남양(南陽) 등지를 침범하였다.

또, 그해 윤택(尹澤)·이승로(李承老) 등이 왕이 어려서 국정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원나라에 청하여 강릉부원대군 기(江陵府院大君祺:공민왕)를 왕에 오르게 하고 그는 강화에 추방되었다가 이듬해 독살을 당하니 나이 15세였다. 총릉(聰陵:開城)에 장사지냈으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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