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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ology/歷代中國 2008/06/18 16:46 by 美
역사상 수많은 사랑이야기 가운데, 절세미녀 양귀비(楊貴妃)와 절대 권력을 휘둘렸던 현종(玄宗)의 사랑 이야기만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있을까? 오늘은 백거이가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을 노래한 시의 일부분을 보기로 한다.

回眸一笑百媚生,  눈동자를 돌려 살며시 미소 지으면 끝없는 애교 발산하여,
六宮粉黛無顔色. 수많은 후궁들의 빼어난 아름다움 빛을 잃게 되었네.

後宮佳麗三千人  후궁에는 삼천 명의 미인 있으나
三千寵愛在一身  삼천 명에게 갈 사랑을 홀로 독차지하였네
.


당 현종이 재위한 기간 중 전반기인 개원(開元) 연간에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에 버금갈만한 치적을 세워 '명황(明皇)'으로 까지 칭해졌으나 후반기로 갈수록 그의 명성은 퇴색하여 당의 멸망을 재촉하는 단초를 제공한 황제가 되었다. 당의 쇠퇴를 전적으로 현종이 양귀비에게 빠져 정사를 그르친 것으로 책임을 돌릴 수는 없을지라도, 현종의 양귀비에 대한 미혹이 정치를 함에 있어 판단과 통찰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현종에게는 여러 가지 수식이 따라 다니는데, 그것들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현종은 당대 (唐代) 여러 황제 가운데 재위 기간이 가장 긴 황제였다. 그는 712년 황제의 자리에 올라 45년 동안 황제로 군림하였다. 현종은 또한 가장 장수한 황제였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그는 78세까지 장수하였다. 그리고 현종은 자신의 생일인 8월 5일을 경축일로 삼아 전국적으로 3일을 쉬도록 하였는데, 이 또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현종은 자녀를 가장 많이 둔 황제였다. 그에게는 30명의 아들과 29명의 딸 등 모두 59명의 자녀가 있었다.

당 현종의 제위가 더할 나위 없이 공고해질 즈음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비인 무혜비(武惠妃)가 세상을 떴다. 황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오랫동안 애통해 하였다. 이 때 주위에서 현종에게 여러 여인을 추천하였지만 눈에 들어오는 자가 없었다. 얼마 후 한 여인이 현종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뜻밖에도 자신의 아들 수왕(壽王)의 비인 양옥환(楊玉環)이었다. 양옥환의 미모에 홀린 현종은 이것 저것 잴 여유가 없었다. 혜비가 죽은 지 1년도 되지 않아 현종은 자신의 비로 삼아 혜비가 받았던 예우로 똑같이 양귀비를 예우하는 동시에, 자신의 아들에게는 다시 다른 여인을 비로 간택해 주었는데, 이 때 현종은 이미 50대였으며 양귀비는 17살이었다.      
양귀비의 미모는 백거이가 그의 시 <장한가>에서 묘사한 것처럼 현종을 홀리고도 남을 정도로 출중하였다.

현종은 양귀비와의 사랑에 밤이 짧은 것은 안타까워하며, 조정에 나가 정치를 하는 것을 게을리하기 시작하였다. 이 즈음 잠재해 있던 여러 문제점들과 혼란이 한꺼번에 폭발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안록산(安祿山)의 난이다. 755년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공격하여 점령하고는 이듬해는 당시 수도였던 장안마저 점령하자,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신하들과 촉(蜀) 땅으로 피난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때문에 현종은 반란군을 피해 도주한 첫 번째 황제라는 불명예 또한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현종이 도주한 이튿날 행차가 마외(馬嵬)라는 지역에 다다랐을 때, 황태자 이형(李亨)은 여러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간신 양국충(楊國忠)을 처결하고, 아울러 현종에게 양귀비 또한 사형에 처하도록 압박하였다. 이미 권위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명목상 황제로 남아있던 현종은 피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면서 양귀비를 하얀 비단으로 목 졸라 황천길로 가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38 살이었다.    




君王掩面救不得  황제는 차마 보지 못하고 얼굴 가리며 양귀비를 구하지 못하는데,
回看血淚相和流  뒤돌아보는 황제의 눈에는 피눈물 흘러내리네.




현종은 양귀비를 이곳 마외에 매장한 후 촉 땅으로 서둘러 피난 갔다. 양귀비의 묘는 원래 흙으로 덮여있던 토총이었으나, 이 흙에서 향기가 나고 피부에 좋다는 소문이 나 많은 사람들이 몰래 흙을 파가는 바람에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이에 다시 봉분을 벽돌로 쌓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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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ology/歷代中國 2008/06/18 16:43 by 美
오늘은 그리움을 읊은 시를 본다. 장구령이 지은 <망월회원>시는 한없는 그리움을 밝은 달에 기탁하고 있는데, 구체적이고도 선명한 예술 형상을 동원하여 독자를 감동시키는 힘이 매우 크다. 먼저 시를 읽어 보자.


海上生明月  바다 위로 떠오른 밝은 달을
天涯共此時  하늘 끝에서 님도 보고 있겠지
情人怨遙夜  그리운 님은 긴 밤 원망하며
竟夕起相思  밤이 다 가도록 나만 생각하리라
滅燭憐光滿  촛불 끄니 방안 가득한 달빛 더욱 서러운데
披衣覺露滋  옷 걸치니 옷은 이미 이슬로 축축하네
不堪盈手贈  손에 가득 담아 님에게 보낼 수도 없으니
還寢夢佳期  다시 잠들어 꿈속에서나 만나야 하리



위 시에서 요야(遙夜)는 기나긴 밤을, 경석(竟夕)은 밤이 다가도록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불감(不堪)은 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위 시는 고래로 많은 사람들의 높은 평가를 받아온 시이다. 특히 "바다 위로 떠오른 밝은 달을 하늘 끝에서 님도 보겠지." 첫 두 구절은 지금도 자주 인용 되어지는 명구이다. 이어 나의 사랑하는 님 역시 내 생각에 전전반측하며 온 밤을 하얗게 지새울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님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갈수록 더욱 잠들지 못하는데 혹시라도 촛불이 너무 밝아 그런 것인가 하고 촛불을 끈다. 그러나 촛불을 끄자 방안 깊숙이 비치는 달빛이 더욱 밝게만 느껴진다. 밝게 비치는 달빛은 도리어 그리움만을 더욱 재촉할 뿐이다. 잠 못 들고 밖에 나가고자 옷을 걸치니 옷은 이미 이슬이 배어 축축하다. 마지막 두 구절은 더욱 절묘하다. 돌연 아름다운 달빛을 님에게 보내고 싶은 간절함이 마음 속에서 꿈틀거린다. 그러나 달빛을 손에 담아 보낼 수도 없어, 꿈속에서나마 그리운 님을 만나고자 침상에 돌아와 잠을 청한다.    
우리나라에도 달을 매개로 하여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많은데, 김용택 시인의 <그리움2>라는 시가 그 중 하나이다.



이 세상 그리움들이 모여
달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득 달을 보면
참 달이 밝기도 하구나 라고 말한다.



이 시를 지은 장구령(678~740)은 자가 자수(子壽) 혹은 박물(博物)로 소주(韶州) 곡강(曲江 : 현재 광동성(廣東省) 소관시(韶關市)) 사람이다. 경룡(景龍) 초(707) 진사에 등과하여 교서랑(校書郞)에 임명되었다. 이후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문인 재상 장열(張說)의 추천을 받아 중서사인(中書舍人)과 중서시랑(中書侍郞)을 거쳐 733년 재상이 되었고, 이듬해 중서령(中書令)으로 옮겼다. 사람됨이 현명하고 정직하였으며 조정의 중대한 정책의 시행에 참여하여 개원(開元) 연간의 저명한 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 아니라 문학 방면에서도 당시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개원 24년(736) 이임보 (李林甫)에게 미움을 받아 재상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후로 조정은 날로 부패하여 '개원지치(開元之治)'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듬해 형주장사 (荊州長史)로 폄적당했다가, 몇 년 후 세상을 떴다. 그의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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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ology/歷代中國 2008/06/18 16:40 by 美
중국 절강성 항주에서 남쪽으로 90여 킬로미터 떨어진 절강성 주지라는 곳이있다.  그곳은 중국 역사상 유명한 미인인 서시(西施)의 고향이다.  그곳은 서시고리(西施故里)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유적지가 복원되어 많은 관광객들로 늘 붐빈다.


香徑長洲盡棘叢  향경과 장주에는 온통 가시덤불
奢雲艶雨只悲風  사치와 호색의 오왕은 간 데 없고 슬픈 바람 뿐
吳王事事堪亡國  나라를 망친 것은 모두 오왕 때문이지  
未必西施勝六宮  서시가 다른 비보다 예뻐서가 아니라네



위 시는 춘추전국 시대의 오(吳)나라 멸망의 원인이 서시(西施)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개인적인 사치와 호색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위에서 오궁(吳宮)은 오왕 부차가 서시를 위해 지어준 궁궐이며, 향경(香徑)은 오왕 부차가 서시를 위해 건설한 수로로, 서시는 이 수로에 배를 띄우고 꽃을 땄다.  장주(長洲)는 장주원 (長洲苑)으로 오왕 부차의 사냥터를 말한다. 그 화려했던 날들을 호령했던 오왕도 보이지 않고, 당시의 호화스런 수로와 장주는 이미 폐허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육궁(六宮)은 황후와 비가 거주하던 곳으로 여기에서는 그곳에 거처하던 후와 비를 일컫는다.  이 구절에서는 서시에게 오왕이 멸망한 죄를 물을 수 없음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  

서시는 옛 월(越)나라의 여인으로 남의 빨래를 해주며 생계를 이어가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왕소군(王昭君), 초선 (貂蟬), 양귀비(楊貴妃)와 더불어 중국의 4대 미녀에 속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그 중 서시를 으뜸으로 쳐서 미의 화신으로 간주하고 있다.  서시를 이야기하자면 늘 침어(沈魚)라는 고사가 생각나는데, 이는 서시가 강가에서 빨래할 때 맑은 강물 위에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가 비치자 물고기조차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이 나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버려 강바닥에 가라앉고 말았다는 데에서 유래된다.    
당시 서시의 월나라는 오나라에게 대패하여 월왕 구천(句踐)과 그의 신하 범려(范   )는 인질로 오나라에 잡혀가게 되었다.  구천은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부차에게 짐짓 매우 충성스런 태도를 고수하였다.  부차가 병이 났을 때 어떠한 약을 써도 듣지 않자, 부차의 대변을 직접 맛보고 처방을 내려주면서까지 자신에게는 추호도 원망함과 복수할 마음이 없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에 안심한 부차는 구천과 범려를 다시 월나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오나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며, 안으로 부국강병에 힘쓰는 한편 미인계를 써서 오왕 부차를 무너뜨리고자 미인 서시를 부차에게 바쳤던 것이다. 아름다운 서시가 오나라로 들어오자 예상했던대로 오왕 부차는 서시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음락에만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월왕 구천은 군사를 출동시켜 오나라를 함락시키고 복수를 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이 물고기도 넋을 빼고 바라보던 아름다운 서시를 항주 서호에 비유하여 서호의 명성을 더욱 드높인 문인이 있었는데, 그는 다름아닌 송대의 소동파(蘇東坡)이다.  그가 서호에 대해 읊은 시는 서호를 노래한 수많은 문인들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절창으로 손꼽히고 있다.  비 갠 후에 서호 가에서 술을 마시는 정취를 읊은 그의 시를 또한 여기에 소개한다.



水光晴方好  호숫물 반짝거려 맑은 날 좋더니,
山色空蒙雨亦奇  산 어둑 어둑 비 내려도 기이하네.
欲把西湖比西子  서호를 서시에 비유하니,
淡粧濃抹總相宜  옅은 화장 짙은 화장 모두 제격이네.


소동파의 위 시는 서호가 어떠한 날씨이든 나름대로의 운치를 지니고 있음을 서시의 자태를 빌어 이야기하고 있다.
위 시의 작자인 육구몽은 만당(晩唐)의 시인으로 자는 노망(魯望)이고 號는 강호산인(江湖山人), 천수자(天隨子), 보리선생(甫里先生)등으로 불렸다. 소주(蘇州)의 명문 출신으로 어렸을 때 이미 육경 (六經)에 능통하였으며, 특히『춘추(春秋)』에 조예가 깊었다.  함통(咸通) 연간에 진사시험에 낙방한 후 다시 응시하지 않고 송강(松江)의 보리(甫里) 에 은거하여 농경 생활에 힘쓰는 한편 시를 즐기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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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ology/歷代中國 2008/06/18 16:38 by 美
왕창령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위 작품은 총애를 잃은 궁녀의 고통과, 그들에 대한 동정을 표현하고, 나아가 여인에 탐닉하여 국사를 그르치는 황제를 풍자하고 계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하겠다.

시의 첫 두 구절에서는 매일 아침 비를 들고 청소 등 판에 박힌 일을 해야 하는 궁녀의 무료함과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해 갈피잡지 못하는 궁녀의 심사를 서술하고 있다.  이어 뒤 두 구절에서는 반첩여의 고사를 인용하여 이 궁녀의 서러움을 표현하고 있다.
위에서 소양(昭陽)은 한나라 때의 궁전인 소양전으로 한(漢) 나라 황제인 성제(成帝)와 조비연(趙飛燕) 자매가 기거했던 곳이다.  고대에는 태양으로 황제를 비유했기에 위 시구 중 일영(日影)은 황제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까마귀는 오히려 소양전 위를 날며 소양전의 햇빛을 받을 수 있지만, 자신은 장신궁(長信宮) 깊은 곳에 기거하기 때문에 황제를 한번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옥 같은 얼굴이 새까만 까마귀만도 못함을 한탄하고 있다.    

반첩여라는 여인은 누구인가? 반첩여는 한나라의 성제가 막 즉위할 때 후궁으로 뽑혀 들어온다.  처음에는 소사(少使)라는 관직에 임명되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황제의 큰 총애를 받아 첩여가 되어 황제의 아들을 낳았으나, 수개월  만에 그 아들을 잃고 만다.  그녀와 성제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가 얼마나 현명하고 법도를 잘 지키는 여인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어느 날 성제가 궁궐의 후정에서 유람할 때, 황제는 첩여에게 수레를 같이 타고 갈 것을 권유하지만, 첩여는 사양하며 "옛 그림을 보면, 어진 군주들은 모두 유명한 신하들을 곁에 두었으나, 하·은·주의 마지막 왕들은 곁에 사랑하는 여자들을 두었습니다.  지금 수레를 같이 타고자 하신다면, 그들과 같아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는 말로 황제의 권유를 사양하였다. 황제는 그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는 더 이상 권유를 할 수 없었다. 태후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옛날 번희(樊姬)가 있었다면, 지금은 반첩여가 있구나."라는 말로 첩여의 행동을 칭송해마지 않았다.  번희란 여인은 춘추시대 초(楚)나라 장왕(莊王)의 비로 장왕이 사냥에 탐닉하였을 때 번희가 수차례 그만 둘 것을 간하였으나 장왕이 말을 듣지 않자, 그녀는 그 이후로 짐승의 고기를 일절 입에 대지 않아, 왕이 잘못을 고치고 정사에 힘쓰도록 유도했던 여인이다.  

첩여는 이후에도 성왕들의 예법을 준칙으로 삼아 조심스럽게 행동함으로써 안에서 황제를보필하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황제는 점점 여자에 탐닉하였다.  얼마 후 미천한 출신인 조비연 자매가 국가의 예의 법도를 무시하고 점점 황제의 사랑을 차지하게 된다.  이에 반첩여와 당시의 황후 허황후는 모두 총애를 잃고 황제를 만날 기회조차 없게 되고, 급기야 조비연은 허황후와 반첩여가 주술로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고, 후궁들을 저주하고, 황제까지 비방한다고 참소하였다.  허황후는 이 때문에 폐위되었고 이어 황제는 이 사실을 반첩여에게 추궁하자, 첩여가 대답하기를, "소첩이 듣기에 삶과 죽음은 명에 달려 있고, 부와 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저는 몸을 닦고 마음을 바르게 했어도 여전히 복을 받지 못했는데, 사악한 욕심을 부려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만약 귀신이 안다면 신하의 도리가 아닌 저주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만약 귀신이 모른다면 저주한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저는 이러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황제는 그녀의 대답에 수긍을 하고 그녀의 행실을 칭송하였지만, 첩여는 조씨 자매의 교만과 투기 때문에 위기가 곧 자기에게 닥칠 것을 예상하고는 장신궁에서 황태후를 모실 것을 자원하였고, 황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 후 첩여는 장신궁으로 물러나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眞成薄命久尋思  참으로 박명한 신세되어 오랜 그리움에 헤매이다
夢見君王覺後疑  꿈속에서 임금님을 뵈옵곤 깨고 나니 의심스럽네
火照西宮知夜飮  불빛은 서궁을 비추니 저녁 향연 있음을 알겠건만
分明複道奉恩時  성은(聖恩)을 받들던 때의 통로만이 훤히 빛나네

 
위 시를 지은 왕창령 (698~756)은 서안 사람이다. 그는 용표(龍標 : 지금의 湖南省 黔陽縣)로 귀양간 적이 있어 왕용표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용표에 가면 그의 자취를 많이 볼 수 있다.
그의 시는 구성이 긴밀하고 구상이 청신하였으며, 특히 7언절구에서 뛰어난 작품이 많아 '칠절성수 (七絶聖手)'라 칭해지기도 한다.  위의 시 역시 7언절구의 형식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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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ology/歷代中國 2008/06/18 16:22 by 美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한 해를 보내는 심사가 예년과는 다르다.
고향을 떠나 이국에서 또 한 해를 보내야만 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리라.
섣달 그믐날 고향의 가족을 그리며 쓴 고적의 제야작 (除夜作)의 심정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旅館寒燈獨不眠    객사의 차가운 불빛 아래 홀로 잠 못 이루고
客心何事轉悽然    나그네 마음이 왜 이리도 처량해질까?
故鄕今夜思千里    고향의 식구들 오늘밤 천리 밖 나를 생각하리니
霜偸明朝又一年    서리 같은 귀밑머리 내일이면 또 새해네




위 시는 고적이 섣달 그믐날에 고향의 식구를 그리며 지은 시다.  제야(除夜)는 섣달 그믐날 밤으로 제석(除夕)이라고도 한다.  상빈(霜偸)은 서리 같이 하얀 머리카락을 일컫는다.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즐거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가족과의 이별로 도리어 처량해지는 자신을 주체할 길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향수를 직접 서술하지 않고, 고향의 식구들이 자신을 생각하는 것으로 설정하여 자신의 간절한 향수를 강조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고 하겠다.
위 시의 작자인 당(唐)나라 시인 고적(高適)을 떠올리면 곧 지금의 티벳이 생각난다.  아직도 원시적인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어 누구나 한번쯤은 가고 싶어 하는 땅  티벳.

고적은 753년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였던 명장 가서한(哥舒翰)의 막부(幕府)에 들어가 현재의 티벳 지역에 있었던 토번(吐蕃)이라는 나라를 격파하여 구곡(九曲)이라는 지역을 탈환하는 전투를 직접 목도하게 되고, 그것을 구곡사(九曲詞)라는 시로 칭송을 한 바 있다.
구곡이란 지역은 지금의 칭하이성(靑海省) 바옌시엔(巴燕縣) 일대로 수초가 무성하여 목축을 하기에 적당했는데, 당과 토번은 이곳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각자의 통치 하에 두려고 자주 충돌하였다.  710년 당으로부터 이곳을 차지한 토번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자주 하서주랑(河西走廊)을 단절시켜서 안서사진(安西 四鎭)을 고립시키고 동쪽으로 진출하여 당을 더욱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당은 753년에 이르러서야 가서한 장군이 토번에게 빼앗겼던 구곡을 모두 되찾게 되었던 것이다.

당나라와 토번의 관계가 매우 우호적이었던 때는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시절이었다.
당시 토번의 국왕은 송찬간포(松贊干布 : 617-650 재위)라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청장(靑藏)고원 내의 여러 장족을 통일한 후,  632년 지금의 중국 시장(西藏) 라싸에 수도를 정하고 토번왕조를 세웠다.  그는 왕이 된 후 국가를 안정적으로 이끌기 위해 자신과 이웃나라의 공주들과의 혼인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는 우선 서쪽에 있는 네팔 왕국의 공주와 결혼을 한 후, 640년 자신의 신하인 녹동찬(祿東贊)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당나라의 공주와의 결혼을 요청하였다.  녹동찬이 결혼 요청 사절로 당나라에 들어온 그 때, 주변의 천축국(天竺國), 대식국(大食國) 등 다른 여러 나라도 사신을 파견하여 당나라의 수도는 여러 나라의 사신들로 북적거렸다.  당태종은 여러 나라에서 온 사신들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었기에, 평범한 사람들은 미처 생각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그들에게 제시하여, 지혜롭게 문제를 푼 사신의 나라에 공주를 시집보내도록 결정하였다.

당태종은 그들에게 총 6문제의 난해한 문제를 출제하였는데, 녹동찬만이 그 문제를 순조로이 풀 수 있었다.  당태종은 토번에서 온 사신의 지혜를 치하하는 한편, 토번의 문화 수준에 만족해하고는 토번의 국왕과 당나라의 문성공주(文成公主)의 결혼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장족과 한족의 아름다운 혼사이다.
당태종이 출제한 문제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 중 대표적인 문제를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독자 여러분들도 풀어보시기 바란다.

첫째, 구슬에 아홉 개의 구멍이 굽이굽이 뚫어져 있는데, 어떻게 이 곳에 명주실을 꿸 수 있는가?  둘째, 100마리의 어미 말과 100마리의 새끼 말이 있는데, 100쌍의 어미 말과 새끼 말을 완벽하게 짝지을 수 있는가?  셋째, 위와 아래의 굵기가 동일한 통나무가 있는데, 어느 쪽이 뿌리 부분이고 어느 쪽이 가지 부분인가?  넷째, 300명의 궁녀에게 똑같은 옷을 입히고 그 중에서 문성공주를 찾도록 하는 문제가 그 것들이다.  

641년 당태종은 예부상서인 이도종(李道宗)으로 하여금 16세인 문성공주를 호위하여 티벳 라싸로 들어가도록 하였다.  이 결혼으로 당과 토번 사이에는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전쟁이 드물어지고 상인들과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해지게 되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티벳도 청장(靑藏)철도가 최근 개통되면서 이젠 우리의 곁에 가까이 와 있다.  1300여년 전 문성공주가 실마리를 푼 중국과 티벳간의 왕래와 우호가 올해 드디어 그 의미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여러분 모두 고향을 생각하며 따뜻한 가슴으로 새해를 맞이하시길 빈다.




글 최경진 (백석대학교 교수)
http://www.koreanh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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